|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천혜의 요새 삼랑성과 전등사 (5)

인천투데이 = 천영기 시민기자 | 전등사 대웅보전은 건물 자체만으로도 보물이지만 그 내부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화재급 유물들이 있다. 불자야 쉽게 법당 안에 들어가지만 종교가 다른 탐방객은 법당에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찰에 왔으면 사찰의 격식을 갖추면 되는 것. 손을 가슴에 모아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면 된다.

전등사 대웅보전 내부 유물들. 아래부터 수미단, 업경대,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후불탱, 오른쪽 뒤 묘법연화경 목판.
전등사 대웅보전 내부 유물들. 아래부터 수미단, 업경대,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후불탱, 오른쪽 뒤 묘법연화경 목판.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전등사 대웅전 내부 불단(佛壇,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만든 높은 단) 위에는 보물 제1785호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있다. 중앙에는 현세불인 석가여래상, 왼쪽에는 과거불인 약사여래상, 오른쪽에는 미래불인 아미타여래상을 모셨다. 아미타여래상 내부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통해 수연(守衍)이 수화승(首畵僧, 화승 가운데 우두머리)으로 참여해 1623년(광해군 15년)에 조성한 불상임이 밝혀졌다.

석가여래상은 주존불임을 강조하기 위해 좌우 불상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세 불상 모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머리카락은 소라 모양의 나발(螺髮)이다. 머리와 육계(肉髻,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정수리에 상투처럼 솟은 부분) 사이의 중앙계주와 육계 위의 정상계주를 구슬로 장식하는 대신 불상의 금색으로 표시했다.

아미타여래상 안에서 나온 발원문.(사진출처ㆍ국가문화유산포털)
아미타여래상 안에서 나온 발원문.(사진출처ㆍ국가문화유산포털)

미간에는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온 세계에 비춘다는 의미를 지닌 하얀 털, 즉 백호(白毫)가 나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투명한 구슬이 박혀있다. 귀는 두텁고 매우 길며, 목에는 수행의 세 단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세 줄기 주름인 삼도(三道)가 있다. 발은 수행의 으뜸 자세인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석가여래상의 법의(法衣, 스님이 입는 옷)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이다. 밋밋한 가슴 아래로는 연꽃잎이 위로 향한 앙련형(仰蓮形)의 내의 자락을 그 아래 띠 매듭으로 둘렀다.

손의 모습은 석가모니만 취할 수 있는 형태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깨달음에 이르기 직전 유혹을 받은 부처가 지신을 가리키며 마군을 물리쳤음을 증명하는 자세)을 취하고 있다. 오른손은 정강이 위에 올려놓고 손등을 밖으로 향해 다섯 손가락을 펴서 땅바닥을 가리키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형상이다.

약사여래상과 아미타여래상의 법의는 양쪽 어깨를 다 덮는 통견식(通肩式)이지만, 두 불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쪽 어깨 위 주름, 가슴 아래 띠 매듭 위 내의 자락, 왼쪽 무릎 위 옷자락, 두 다리 사이의 옷 주름에서 약간 차이를 보인다.

또, 약사여래상은 오른손을 어깨 위로 왼손은 아래에 두고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 약지를 구부려 구품인(九品印,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나눈 9개의 손 모양) 중 중품하생의 반대 모습을 취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상은 이와 정반대의 자세인데, 예전에 사진을 찍은 것과 비교해보니 왼손이 망가졌는지 위로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를 향하고 있다.

수미단의 익살스러운 도깨비 문양과 화려한 조각들.
수미단의 익살스러운 도깨비 문양과 화려한 조각들.

수미단(須彌壇)과 업경대(業鏡臺)

불상을 안치하고 있는 불단을 수미단이라고 하는데, 이는 불교의 세계관에서 그 중심에 위치한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 부처님이 앉아 자비와 지혜의 빛을 발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8호인 대웅보전 수미단은 대웅보전 내 닫집(법당의 부처를 모신 자리 위에 장식으로 만든 집의 모형)과 더불어 장엄한 불교세계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수미단은 하대ㆍ중대ㆍ상대로 이뤄졌다. 하대는 받침으로 쓰이는데 아래쪽에는 곡선의 조각이, 위쪽에는 복련(覆蓮,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의 무늬)이 연이어 새겨져 있다. 중대는 3단으로 만들어졌는데 각 단은 칸을 어긋나게 배치했고, 칸마다 다양한 문양을 조각했다. 아래 1단은 불법의 수호신격인 도깨비와 같은 문양을 각기 다른 표정으로 익살스럽게 조각했다. 2단과 3단에는 각종 꽃과 풀의 모양을 매우 화려하게 투각했다. 중대 위에는 큰 널빤지를 깔고 그 위에 상대를 올렸는데 각 칸에는 화병에 꽂힌 꽃들을 조각했다.

상대의 상부에는 업경대를 올려놓은 단상대가 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7호인 전등사 업경대는 좌대 바닥에 묵서 명문이 남아 있어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제작 연대가 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목조 공예품의 편년을 설정하는 기준이 되며, 목조 공예품들을 비교ㆍ연구하는 데 획기적 자료로 평가된다.

업경대란 염라대왕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갔을 때 생전의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이 그대로 비춰진다는 거울이다. 단상대 왼쪽에는 청색 사자를, 오른쪽에는 황색 사자를 배치했고, 사자의 등 위에는 불꽃이 활활 타고 있는 화염무늬를 두른 거울을 꽂았다. 이를 대웅보전에 설치한 것은 살아생전에 선업(善業)을 많이 쌓으라는 경계일 것이다.

대웅보전의 화려한 닫집.
대웅보전의 화려한 닫집.

후불탱화와 닫집 등

탱화(幀畵)란 천이나 종이에 부처ㆍ보살ㆍ성현 등 불교적 내용을 그려 벽에 거는 그림을 말한다.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바로 뒤에 인천시 문화재 자료 제21호로 지정된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중앙에는 석가여래를, 그 양쪽에는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함께 그린 한 폭의 삼세불화(三世佛畵)이다. 세 부처의 앞쪽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비중 있게 그리고 그 주위에는 가섭과 아난, 사천왕, 지장보살, 제자들을 화면에 꽉 차게 그렸다. 전체적으로 황토색과 진한 녹색, 분홍색 등을 썼으며 얼굴이나 옷의 주름 등에 명암법을 사용해 입체감을 줬다.

대웅보전의 닫집은 중앙을 가로지르는 두 대들보 사이에 설치돼있다. 지붕 위에 박공(牔栱, 팔작지붕이나 맞배지붕에서 양 옆면에 ‘人’자형으로 붙인 건축 부재)을 세우고 지붕 전체를 얇은 기둥으로 지탱하고 있으며 정자형(丁字形)의 상부구조 평면 형태를 하고 있다. 천장은 네 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겹처마로 구성하고 작고 섬세하게 외출목의 공포를 표현했다. 좌우 협칸에는 극락조를 매달아 놓았고, 앞으로 돌출된 칸에는 구름 사이로 머리를 내민 용이 화염에 쌓인 여의주를 향하고 있는 조각이 매달려 있다.

대웅보전 충량(衝樑)은 혓바닥을 내밀어 그 위에 여의주를 올린 용의 모습인데 무섭다기보다는 친근하게 표현했다. 충량은 측면 기둥머리에서 대들보를 향해 건 보를 말하는데, 중도리 등을 떠받쳐 지붕 합각부의 무게를 지탱하고 그 무게를 대들보와 기둥으로 분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천장은 고색창연한 단청무늬, 비천문, 극락조, 물고기, 연꽃 등 다양한 조각이 곳곳에 장식돼있어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묘법연화경 목판(妙法蓮華經 木板)

묘법연화경의 약칭은 법화경이다. 초기 대승경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경으로 모든 경전 중 으뜸이라 칭하는데, 부처의 40년 설법을 집약하는 정수를 담고 있다. 전등사에 소장된 묘법연화경 목판은 1443년(세종 25년) 성달생이 정서해 새긴 고산 화암사판을 바탕으로 1543년(중종 38년) 마니산 정수사에서 그대로 본떠 다시 목판으로 새긴 것이다.

목판 한 면에 두 장을 새겨 앞뒤 총 네 장이 판각돼있다. 대웅보전 오른쪽 뒤 유리로 문을 만든 장에 104매가 보관돼있는데 원래는 105매였다. 1매가 한국전쟁 때 외부로 유출돼 없어졌다고 한다. 일부 목판에서 벌레로 인한 훼손이 보이나 대부분의 경판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조선 초기부터 16세기까지 성행한 성달생 서체 계열의 묘법연화경 가운데 시대가 가장 앞서는 목판 자료라는 점과 경판 조성과 이에 관련한 기록, 관련한 승려의 이름 등이 새겨져 있어 학술적 가치와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보물 제1908호로 지정돼있다.

병인양요 때 병사들이 기둥과 창방, 인방, 문설주에 쓴 이름.
병인양요 때 병사들이 기둥과 창방, 인방, 문설주에 쓴 이름.

대웅보전 내부 곳곳에 적힌 이름들

대웅보전 내부의 기둥과 창방, 인방(引枋, 기둥과 기둥 사이 또는 창호 따위의 아래위에 가로놓여 벽을 지탱해주는 나무), 문설주, 닫집의 얇은 기둥, 우리판문 등을 보면 곳곳에 낙서처럼 먹물로 쓴 이름들이 빽빽하다. 명승지의 석벽이나 바위에 적힌 이름들을 많이 봤기에 대웅보전에 적힌 이름들도 처음 봤을 때는 불자나 관광객이 가문의 번창이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병사들의 이름이다. 그들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법당에서 공양을 드리고 전투에서 승리하고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동일한 필체가 많은 것으로 봐 자신의 이름을 적을 수 없는 병사들의 것은 대신 써준 것 같다.

사찰 측은 이들의 호국정신을 높이 평가해 이름들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름을 적어나간 병사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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