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연구원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연구원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연구원

인천투데이│강화도와 서해 5도를 포함한 인천 해역은 예로부터 삼남(경상, 전라, 충청)과 양서(황해, 평안)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물길이었기에 중시돼왔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인천의 연안으로는 수많은 방어시설과 성곽, 군진(軍鎭)이 들어서기도 했다. 강화도 돈대와 주변 도서 수군진, 인천 해안에 뒀던 포대 등이 그것이다.

인천 해역은 물길의 경유지이자 물류의 중심지로서도 중요한 곳이었다. 삼남과 양서에서 들어오는 물자(物資)는 어김없이 인천 연안과 강화도 해역을 지나야했고 물때를 기다리는 기착 포구는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포구가 강화도 산이포(山伊浦)다.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에 위치한 산이포는 양서에서 서울로 가거나 삼남에서 개성으로 가는 배들이 물때를 기다리던 포구였다. 각종 상선과 조기 운반선은 서울 혹은 개성으로 가기 위해 물때를 기다렸고, 선원들이 묵을 여관과 상점, 술집 등이 들어섰다. 사람이 모이자 5일장과 우시장도 생겨나 신이포구 마을은 점점 커졌다.

강화도 산이포 1954년 항공사진.
강화도 산이포 1954년 항공사진.

당시를 기억하는 철산리 주민의 전언에 따르면 산이포에는 700여 가구가 모여 살았고, 미로처럼 얽혀있는 골목은 주민조차도 길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연평도에서 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오는 날에는 파시가 열렸는데 철산리 주민들은 한 번에 1000마리씩 사서 굴비를 만들어 먹고 팔기도 했다. 산이포는 뱃사람이 많이 드나든 곳이라 굿도 자주 열렸는데 개풍군의 만신(萬神)이 넘어와 굿을 하기도 했다. 또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해역이라 어업도 성행했다. 주민들은 산이포 앞을 지나는 조강에서 새우, 장어, 농어, 굴 등을 잡았다.

이렇듯 산이포는 물길의 기착지이자 어업이 번성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강하구는 정전협정상 민간의 항행이 보장되는 곳이었지만 남북의 격렬한 대치는 산이포의 생기를 앗아갔다.

전쟁이 끝나고도 강화도 북부는 간헐적으로 북한의 포격을 받았고, 결국 산이포 주민들은 인천으로 대거 이주했다. 급기야 1963년 어로한계선이 설정되면서 산이포를 포함한 조강과 한강하구 전역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땅이 됐다. 그렇게 산이포는 사라졌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에서는 서해 접경지역 강화권역, 황해남도권역의 전통 포구를 조사하고 있다. 필자가 조사해보니 산이포 마을은 논으로 변했지만 아직도 해안 철책 바깥으로 석축잔교가 남아있다. 전쟁과 분단, 그리고 갈등과 충돌로 산이포는 사라졌지만 번성했던 옛 포구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얼마 전 연평도 앞바다에서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군에 의해 피격돼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돌이켜보면 이번 피격사건 외에도 남북은 서해 접경에서 여러 차례 충돌했다. 정전협정에서 해상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 것이 원인일 것이다.

남과 북이 갈등으로 점철된 바다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정전협정에서 중립수역이자 민간의 항행이 자유로운 서해 접경지역 강화권역은 남북이 함께 이용하는 데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가졌다.

만약 남북의 민간 선박 보호와 충돌 방지를 위해 서로 철책과 총구를 후방으로 조금씩 물리고 산이포 앞바다에서 함께 자유로이 조업한다,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기회를 가진다면, 서해 접경지역의 평화를 가져오는 데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사라져간 산이포가 살아나고 잊힌 일상이 회복되는 일이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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