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심혜진 시민기자 | 나는 언제 손톱을 깎나 생각해보면 항상 글쓰기 직전이다. 내 손톱과 손가락 살은 높이가 같다. 손톱이 1mm 넘게 자라면 글을 쓸 때 손톱이 먼저 자판에 닿는다. 그 소리와 느낌이 불편해서 글쓰기 전 손톱부터 확인한다. 내게 손톱깎이는 노트북과 자판만큼이나 중요한 글쓰기 도구인 셈이다.

사람마다 손톱을 깎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대부분 하얗게 자란 부분이 5mm를 넘기지는 않을 거다. 손톱은 하루에 약 0.1mm씩 자란다. 적어도 두 달에 한 번 이상 손톱깎이를 찾을 수밖에 없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손톱깎이는 새끼손가락 크기에 장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하도 작아서 손톱 가는 판도 없었다. 날이 무뎌서 손톱이 깔끔하게 잘리지 않고 뜯기는 느낌이었다. 엄마 이야기론 당시에는 그마저 귀한 것이었다고 한다.

“나 어렸을 때는 대체로 바느질 가위로 잘랐어. 무쇠로 된 거 큰 거 있잖아. 천도 자르고 하는 거. 날이 두꺼우니까 잘 안 잘리지. 발톱은 더 그렇고. 집마다 가위가 하나씩 있던 시절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뭐. 근데 우리 집에는 어디서 났는지 몰라도 얄쌍한 가위가 있었어. 미군병원에서 수술할 때 쓰는 가위라고 하더라고. 날이 얇고 끝이 길고 뾰족했어. 그걸로 깎은 뒤로는 다른 가위로는 못 깎겠더라고. 시집오기 전까지는 가위로 깎았던 거 같아. 애기를 낳고 손톱깎이로 손톱을 깎아주는 데 아주 힘들었던 생각이 나. 내가 눈이 나쁘잖아. (엄마는 심한 난시다.) 애기 손톱이라 잘 보이지도 않고, 손 다칠까 걱정되고. 그래서 니네 아빠보고 깎으라고 하기도 했어. 그 손톱깎이를 계속 쓴 거야. 그러다가 니네 아빠가 (1989년에) 대만 갔다가 손톱깎이 사왔지. 나는 여태 그걸 쓰고 있어.”

# 저품질 손톱깎이, 88올림픽 순풍 타고 급성장

손톱깎이는 1896년 미국에서 채플 카터가 발명해 1905년 특허를 얻었다. 미국에서 손톱깎이가 대중화된 것은 1947년이다. 우리나라에는 한국전쟁 때 미군을 통해 유입됐다고 본다. (2017.8.16. 한겨레)

우리나라에서 손톱깎이를 처음 생산한 곳은 벨금속공업이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미군에서 나온 드럼통을 자재로 손톱깎이를 만들기 시작했다.(1997.4.14. 동아일보) 1960년대엔 태국과 이란 등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손톱깎이는 귀한 제품이었고 사용이 편리해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품질은 썩 좋지 않았다.

<작년 한때 녹슨 제품으로 이곳(태국 방콕) 수입상에서는 다량 주문을 꺼려한 바 있으나 현재 계속 한국산에 대한 관심도가 높으므로 특히 대외 신용이 추락되지 않도록 품질 유지에 유의하여야 한다.> (1967.5.24.)

<어머니 생신선물도 살 겸 몇 달 동안 절약했던 용돈을 가지고 친구와 어느 백화점엘 갔다. 나는 몇 가지 물건을 사고 친구는 손톱깎이 등을 샀다. 그런데 친구가 산 손톱깎이가 위쪽에 동그랗게 장식이 있기 때문에 손톱이 깎이지를 않는다.> (1971.12.13. 동아일보)

<손톱깎이가 무디어지면 가뜩이나 손톱깎이를 싫어하는 어린이들이 더욱 깎으려 들지 않는다. 이것은 칼날이 무디어져서라기보다는 칼날을 누르게 돼있는 자리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 이럴 때는 손톱깎이의 핸들을 손톱을 깎을 때처럼 뒤로 꺾은 뒤 다시 들어 올려 얇은 알루미늄 판이나 도화지 두세 장 두께를 붙여놓는다. (…) 이렇게 하면 지렛대의 작용이 알루미늄 판이나 도화지의 두께 때문에 강해져서 칼날이 다소 무디어졌더라도 잘 들게 된다.> (1981.4.4. 동아일보)

1980년대 들어서까지 국내 손톱깎이의 품질은 좋아지지 않았다. 질 낮은 원료, 수공업 방식의 생산 과정, 기술 부족 등, 원인은 다양했다. 사람들은 국내에서 생산한 손톱깎이 대신 미국산이나 일본산을 선호했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못 만든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돌 정도였다.

<국산과 미국산, 일본산의 품질 시험 결과 외관은 국산이 100% 모두 양호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내식성에서는 기준 미달이 33.3%였고 날의 강도는 33.3%, 도금 두께는 100%가 기준에 미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외국산은 모두 품질기준을 넘었고 외관도 양호한 것으로 비교됐다. (…) 경도가 낮은 강판을 마구 사용, 손톱깎이와 몸체와 날, 줄을 만들고 따라서 품질은 애당초부터 나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도금과 열처리도 문제가 있다.> (1983.3.19. 매일경제)

1980년대 초반 국내 손톱깎이 생산업체는 벨금속공업, 대성금속공업(현 쓰리세븐), 명성산업사, 로얄금속, 우신흥산 등 총 다섯 개로 생산과정 절반 이상이 기계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공업진흥청은 88올림픽이라는 국제 행사를 앞두고 공산품의 품질을 향상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집중 육성할 품목 100개를 선정했다. 이중 1차 대상 품목에 손톱깎이와 넥타이, 구두, 냉장고, 우산, 라이터 등이 있었고, 대상 업체로는 금강제화, 엘칸토, 금성사, 삼성전자, 한국타이어, 협립제작소, 대림요업 등이 뽑혔다. 손톱깎이 생산업체 중에서는 대성금속과 로얄금속을 선정했다.

이들은 전액 정부 지원으로 기술 지도를 받을 수 있었고, 운전자금과 시설자금도 집중 지원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정부는 이 생산품들의 수준이 향상되면 88올림픽 기념품으로 지정하는 혜택을 주겠다고 했다. 손톱깎이 생산업체들은 기념품 생산 지정 업체로 선정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품질은 크게 향상됐다.

<주부클럽연합회가 최근 실시한 ‘국산품에 대한 소비자 반응 및 인식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산품의 품질 향상에 긍정적 평가를 하는 소비자가 65%에 달하며 특히 외국 제품에 비해 품질이 손색없다고 꼽는 품목은 주방용 칼, 밥솥, 수저세트, 우산, 모발 건조기, 손톱깎이, 수공구 등 주로 중소기업체들이 생산하는 제품인 것으로 나타났다.> (1986.3.28. 동아일보)

# ‘777’ 상표권 놓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우리나라 손톱깎이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소비자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손톱깎이를 생산한 벨금속공업은 ‘BELL’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1980년대 세계 손톱깎이 시장의 60%를 차지했다. 당시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는 여행객들이 외국산 손톱깎이인 줄 알고 사왔다가 국산인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놀라는 일도 있었다. 정부 지원을 받았던 대성금속 역시 ‘777’ 브랜드를 만들어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대성금속은 777이라는 고유 상표로 세계 손톱깎이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손톱깎이를 연간 5000만 개 만드는 천안공장은 단위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 777 상표는 7이란 숫자가 행운을 뜻하며 행운이 겹친다는 의미로 김형규 사장이 직접 고안했다. 이 상표가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자 중국 제품이 555 상표를 수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3.2.17. 경향신문)

대성금속은 뜻밖의 난항을 만났다. 미국의 세계적 항공사 보잉사가 민항기 ‘777’기를 개발하면서 기내에서 사용할 품목 30여 가지도 ‘777’로 상표등록을 했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손톱깎이도 포함돼있었다. 반면 대성금속의 ‘777’은 아직 미국 특허청에 상표로 등록되지 않은 상태였다.

<현재 미 특허법상 손톱깎이는 ‘클래스8’로 분류돼 대성산업이 먼저 사용한 ‘777’ 상표라도 품목 기준이 다른 비행기에는 이 상표를 사용할 수 있으나 같은 품목 기준인 포켓용 나이프, 핸드백, 손톱깎이 등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대성금속 측의 주장이다.> (1995.8.17. 매일경제)

대성금속은 부랴부랴 상표등록을 출원하고 보잉사를 상대로 상표등록 취소 심판을 청구했다. 그러나 미 특허청은 보잉사가 1990년에 먼저 상표를 등록했다는 이유로 대성금속의 상표권 등록에 불가 판정을 통보했다. 보잉사는 이를 근거로 대성금속 측에 상표 사용을 금지할 것과 로열티 지불을 요구했다.

회사 규모나 자금력 면에서 보잉사는 중소기업에 불과한 대성기업에 버거운 상대였다. 그럼에도 대성기업의 승리를 점치는 이가 많았다. 미국은 상표 등록 시기보다 실제로 상표를 먼저 사용한 업체의 권리를 우선시했다. 이른바 ‘선사용주의’ 원칙이다. 대성금속의 손톱깎이는 1984년부터 미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고, 이는 보잉사의 ‘777’보다 무려 6년이나 앞선다.

4년간 끈 소송 결과는 절반의 승리였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국제적 관심을 끈 이 상표 분쟁은 결국 양쪽의 승리로 결말이 났다. 대성 측은 6일 미 보잉사와 777 상표를 공동 사용하기로 최종 합의했다고 밝혔다. 다만 대성의 경우 앞으로 777이란 상표 밑에 ‘대성’이라는 영문을 표기한다는 조건이 달렸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의 손발톱을 관리하던 한국산 손톱깎이는 2000년대 들어 저가 중국제품들에 밀려났다. 그래도 국내 시장에선 여전히 국산 손톱깎이가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 단순해 보여도 금속기술의 집약체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는 손톱깎이가 특별히 없어서 무쇠 가위로 엄마가 깎으려고 하면 너무 아픈 기억 때문에 집을 몇 바퀴 돌고 도망 다니다가 엄마의 손에 잡혀서 할 수 없이 아픈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했다. 그러다가 손톱깎이가 나와서 많이 편리해졌다.> (2015.7.28. 미주중앙일보)

어렸을 때 손톱을 자를 땐 꼭 신문지를 넓게 펼쳐놓아야 했다. 잘린 손발톱이 사방으로 튀었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 플라스틱으로 손톱깎이의 옆면을 감싸 손톱이 튀는 걸 막아주는 손톱깎이가 나왔을 때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요즘에도 단단한 발톱이나 무좀에 걸려 두꺼워진 손발톱을 자르는 기능성 손톱깎이, 날이 1.5배 길고 크게 나온 특대형 손톱깎이, 확대경이 붙은 손톱깎이 등,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너무 흔해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손톱깎이에는 사실 자동차나 항공기 부품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각종 금속가공기술이 동원된다. 크기가 작아 오히려 더 섬세한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금속가공기술의 결정판’이라 부를 정도라 한다.

손톱을 깎아야 글을 쓸 수 있는 난 기술 집약체인 이 사소한 물건에 오늘도 의지하고 의존한다. 어디 손톱깎이뿐일까. 평범한 내 일상은 앞선 사람들의 무수한 노동 덕분에 안락할 수 있음을 손톱깎이가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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