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남매의 여름밤 (Moving On)

인천투데이=이영주 시민기자ㅣ

윤단비 감독│2020년 개봉

[9월 2일 CGV인천 관람] 어느 해보다 무더운 여름. 허름한 반지하에서 낡았지만 넓은 2층 양옥집으로 이사하는 옥주(최정운)의 낯빛이 왠지 불편하다. 신발 노점을 하는 미니 승합차에 짐 몇 가지만 챙겨 아버지, 즉 옥주의 할아버지(김상동)의 양옥집으로 향하는 아빠(향흥주)가 영 미덥지 않다. 할아버지에게는 허락도 받지 않은 것 같다.

더위를 먹어 병원에 갔다는 할아버지를 모시러 아빠는 떠나고 낯선 할아버지의 집엔 옥주와 동생 동주(박승준)만 남는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게 꺼림칙했던 남매는 현관 앞에서 아빠와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그렇게 어영부영 할아버지 집에 더부살이를 하게 된 옥주네 가족. 여기에 결혼의 위기를 맞은 고모(박현영)까지 친정을 찾으면서 할아버지 혼자 지내던 낡은 양옥집은 옥주와 동주 남매, 아빠와 고모 남매가 복작이는 공간이 된다.

윤단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은 10대 옥주의 눈으로 삶과 죽음, 그리움과 원망, 삶의 고단함과 비루함까지 켜켜이 담아내며 그럼에도 빛나는 삶의 순간을 포착한다.

영화는 특별할 것 없는, 어쩌면 구질구질하기까지 한옥주의 일상, 병들고 가난하고 문제 많은 옥주네 가족의 삶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늙고 병든 할아버지, 이혼 후 이것저것 사업에 손대보지만 되는 일 없어 결국 아버지 집에서 얹혀살게 된 아빠, 남편과 못 살겠다며 가출한 고모. 어른들은 불안정하기만 하다.

여기에 귀찮을 정도로 누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동생 동주까지, 영화가 보여주는 옥주의 일상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그런데도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병세가 심해져 대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게 된 할아버지는 옥주에게 전에는 갖지 못했던 자기만의 공간을 갖게 해준 은인이고 무조건적인 긍정의 끄덕임으로 지지해주는 어른이다. 어린 조카 앞에서 술, 담배는 기본에 천방지축처럼 보이는 고모는 옥주가 연애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다.

아빠는 옥주의 소원인 쌍꺼풀시술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은 없어도 옥주의 비행(?)을 너그러이 이해해줄 줄 아는 어른이기도 하다. 귀찮기 짝이 없는 동주는 누나의 신경질을 다 받아내고도 “우리가 싸운 적이 있었나?” 능청을 떨며 다시 누나에게 새살거리는 애교 많은 동생이다.

불안정하고 문제 많은 어른들, 껌딱지처럼 들러붙는 동생…. 옥주를 둘러싼 가족은 사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혹 이기적이기도 하고 무능력하기도 하고, 흠결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비루한 삶들이 어우러져 반짝이는 순간을 만든다. 그렇게 반짝이는 순간 덕에 우리의 삶은 다음으로 나아간다.

우리 삶이 소중한 것은 병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서도 아니다. 그럼에도 반짝이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억지스럽게 포장하지도 극단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집어넣지 않으면서도, 우리 삶이 반짝일 수 있다는 걸 옥주의 여름방학, 남매의 여름밤을 통해 보여준다.

이름 난 배우 하나 없는데도 비루하지만 빛나는 삶을 연기하는 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는 것이 놀랍다. 특히 옥주를 연기한 최정운의 말간 여름 같은 얼굴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무엇보다 10대 여성의 한 계절을 포착했을 뿐인데, 어린 아이부터 죽음을 앞둔 노인까지 두터운 삶의 결을 보여주는 연출의 힘이 놀랍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죽어가는 한국영화의 심폐소생은 30대 여성감독들이 책임질 것 같다. 벌써부터 윤단비 감독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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