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심혜진 시민기자 | 고양이 미미와 코코는 1년 간격으로 우리 집에 왔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둘 다 8월이다. 여름만 되면 이 녀석들을 처음 만났던 때가 자꾸 생각난다. 고된 바깥 생활로 삐쩍 마른 모습이 안쓰러워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2~3년 동안 함께 살다 보니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안다. 강아지는 대체로 먹을 걸 달라고 할 때가 많지만, 고양이는 놀자고 보챌 때가 많다. 성격 따라 좋아하는 장난감도 다르고 놀이 방식도 달리 해줘야하는 까탈스러움이 불만스럽다가도 이내 그 고집과 개성이 고양이들의 매력이라며 마음을 고쳐먹는다. 냥님들이 원하는 대로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며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나면 밥을 먹고 각자 좋아하는 자리에서 잠을 잔다.

조용한 방안. 내 눈엔 이 녀석들에게서 쏟아져 나온 털만 보인다. 몸집도 작은 녀석들한테서 어찌나 털이 많이 빠지는지 선풍기를 돌리면 솜털들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휘날리다가 둥글게 뭉쳐져 방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음식 위에 솜털이 고명처럼 내려앉는 것도 예사다. 이 날리는 털은 빗자루로는 어림없다. 털을 공기처럼 마시고 싶지 않다면 하루 한 번 이상 청소기 돌릴 각오를 해야 한다.

청소기가 없었다면 집 안에서 고양이와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결혼 전 혼자 살 땐 집에 청소기가 없었다. 방이 좁아 걸레질 몇 번이면 충분했다. 결혼 직후에도 집이 그리 넓어지지 않아 청소기를 사용하지 않다가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온 뒤부터 청소기를 돌린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청소기는 1989년 아빠가 대만에 1년간 일하러 다녀오면서 사 온 기다란 빨간색 청소기다. 먼지 통이 손잡이 부근에 달린 핸디형으로 소리가 아주 요란해서 누군가 청소기를 돌릴 때마다 무섭고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 청소기를 못마땅하게 여겨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청소하기 편했을 거 같은데 뭐가 그렇게 싫었을까.

“아빠가 청소기를 사 왔다고?” 당황스럽게도 엄마는 그 청소기를 기억하지 못했다.

“전혀 모르겠어. (내 기억으론 엄마가 무거워서 싫어했던 거 같은데.) 그랬나? 그때 내가 손목이 안 좋긴 했어. 빨래하고 나면 손목이 시큰거렸거든. 그래서 그랬는지 하여간 기억이 안 나. 나는 여기 집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청소기 쓰기 시작했지. 1996년이지. 이전에는 집이 좁아서 청소기로 할 것도 없었어.”

엄마는 자식들에게 집안일을 못하게 했다. 어릴 때부터 하도 일을 많이 해 지겨워서 자식 낳으면 아무것도 안 시키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길 들으며 자랐다. 엄마가 했던 집안일에는 분명 청소도 있었을 거 같았다.

“청소는 네다섯 살부터 했지. 다섯 살 때 이사를 했는데 마루가 넓어서 청소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나.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았지. 빗자루는 수숫대나 갈대로 만들었어. 제일 좋은 건 갈대 빗자루. 갈대에 씨가 들기 전에 베어다가 솥에다 넣고 쪄. 쪄서 말리면 갈대가 질겨지는 거지. 그걸 엮어서 방을 쓸면 최고였어. 옛날엔 다 흙이니까 발에 흙이 많이 묻잖아. 마당에서 발을 씻고 들어와도 흙이 발에 묻는단 말이야. 늘 방이 서걱서걱하지. 그런데 갈대 빗자루로 쓸면 흙이 하나도 없어. 수수 빗자루는 흙이 잘 안 쓸려. 갈대 빗자루는 귀한 편이어서 대체로 수수 빗자루를 많이 썼지. 갈대 빗자루 하나 있으면 닳고 닳아서 빗자루가 주먹만 해질 때까지 썼어.”

“청소는 얼마나 자주 했어?”
“매일 했지. 요즘에는 이틀에 한 번도 하는데, 그땐 저녁마다 매일 했어. 이유가 있었어. 이불 깨끗하라고. 이불 더러워지면 빨래하기가 워낙 힘드니까. 그게 습관이 돼서 요즘도 청소는 저녁에 해. 아침에 하려고 하면 이상해. 저녁에 청소하고, 씻고, 방에 들어와 쉬는 거지.”

# 청소기는 아내를 행복하게 한다?

<전기냉장고 전기청소기 전기세탁기 TV 스테레오전축 기타 등등, 전기를 업은 오토메이숀이 생활을 급변시킨다. 첫 번째 부인들이 할 일이 없어진다. 할 일이 없어지니까 돌아다니는 게 일이다. 부인 상대 ‘하품교습소’가 등장해서 어떻게 하품을 하는 게 70년대식일까, 어떻게 하품과 기지개를 켜는 게 현대감각에 맞을까 … 하품세미나 하품공청회가 열려서 부인들이 바쁘다.> (1971.1.1. 동아일보)

‘71년식 코메디’라는 지면에 실린 콩트 중 일부이다. 전자제품 때문에 할 일이 없어진 ‘부인’들이 하품교습소를 찾아가 70년대식으로 하품하는 법을 배워서 남편들에게 가르친다는 내용이다. 글 속에서 부인들은 허영기가 가득한 반면, 남편들은 ‘아내를 위해’ 전자제품을 사느라 애쓰고 집에선 하품까지 맘대로 하지 못해 피곤하다. 당시 청소기는커녕 냉장고나 세탁기를 사용하는 집이 거의 없던 시기였는데도 이런 내용이 ‘웃자는 이야기’로 새해 첫날 신문에 실렸다. 가전제품은 사용되기 전부터 이미 ‘여성들’을 위한 제품이었다. 다음 기사를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미국 가정의 가전제품 보급률은) 전기세탁기가 94.3%이며 전기청소기는 92.0%이다. 텔레비전의 보급률은 1968년 1월 현재 98.1%이며 64년의 92.8%, 보급률 이후 상승은 거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1973.1.23. 매일경제)

<미국의 어느 보고서에 의하면 “가정의 전화가 완비되어 갈수록 주부의 알레르기 증세가 늘어간다”고 한다. 가정 전화가 되어 갈수록 그만큼 주부들에게 여가가 생기고 그것을 주체하지 못하게 된다는 얘기다. 세탁은 세탁기가 청소는 청소기가 해준다. 힘은 덜 들게 되었지마는 세탁이나 청소를 했다는 만족감은 얻지 못한다. 즉 노동에서 얻던 만족감을 利器(이기) 때문에 잃어버리고 욕구불만 때문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1978.4.10. 동아일보)

미국에서 가정용 진공청소기는 1910년대부터 생산, 보급하기 시작해 1940년대에 이르러 절반 정도의 가정에서 사용하는 필수품이 됐다. 초창기 광고업자들은 자동차가 남성의 필수품이듯이 청소기는 주부의 필수품이어야 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만들었다. 이후에는 건강과 위생을 강조했다. ‘후버 청소기’는 처음으로 청소기를 통해 ‘허드렛일로부터의 해방’을 내세우는 광고를 실었다. 1929년에는 청소기와 청춘을 연결시킨 광고까지 등장했다. “나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남편으로부터 값싸고 귀여운 장신구를 선물 받는 여성이었다. 젊음이 너무나 빨리 시들어 버리고 청소 부담이 너무나 버거운 여자. 어느 해 나는 젊음이 빨리 시들지 않을 수 있고 처소가 부담스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남편이 후버 진공청소기를 사주었다.”

책 ‘세탁기의 배신(뿌리와 이파리)’의 저자 김덕호는 이러한 광고에 대해 “남편은 청소기를 구매할 수 있는 화폐를 제공해주는 사람으로, 그리고 아내는 단지 그 청소기를 이용하는 사용자로 등장하고 있다. 남녀의 구분이 확실하게 분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썼다. ‘선진국’ 미국 문화를 선망하며 많은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는 이러한 광고 속 논리를 그대로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 청소기 생산업체도 같은 내용의 광고를 만들었다. 1977년 신일산업은 “여보, 정말 고마워요 - 신일가전제품은 당신의 아내를 행복하게 합니다”라는 문구를 적은 진공청소기와 세탁기 광고를 신문에 실었다.

<좀 형편이 나은 집 얘기겠읍니다만 세탁은 세탁기, 청소는 청소기, 밥은 전기밥솥, 요리는 가스레인지, 공부는 과외선생이 맡아 틈은 많이 나는, 즉 가사로부터 자유로운 모양인데 일을 못 찾아 방황하는 예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팔자 좋은 여자 가운데 내면적으로 권태로 불행을 느끼기도 하지요. (중략) 사회에서 여자에게 일을 안 주는데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남자로부터 빼앗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1978.9.22)

위 기사는 1978년 최재석 교수와 박완서 작가가 대담한 내용으로, 인용문은 박완서 작가가 한 말이다. 시간이 많은 여성에게 사회가 일자리를 주지 않으니 나중엔 남자의 일을 여자가 빼앗을 거란 내용이다. ‘얼마나 많은 집에 청소기가 있었기에?’ 하는 궁금증이 생길 만하다. 그러나 청소기 보급률은 10년 후인 1988년에야 겨우 15%에 이르렀을 뿐이다.

# 물걸레 기능 추가, 소음 저감…품질 향상 위해 노력

중소기업이 이끌던 국내 소형 가전제품 시장은 1980년대 중반 대기업인 삼성, 금성, 대우가 삼파전을 벌이고 수입품까지 가세하면서 부쩍 성장했다. 초반에는 흡입력을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점차 다양한 기능을 추가한 새로운 상품을 내놓았다. 1990년에는 ‘퍼지이론’을 적용한 상품들이 관심을 끌었다.

<가전업체들이 ‘퍼지가전제품’으로 한판승부를 서두르고 있다. (중략) 퍼지가전제품은 퍼지회로를 IC에 내장해 프로그램화한 것으로 기존의 마이컴 가전제품이 처리할 수 없었던 부분을 기기가 처리할 수 있도록 설계돼있다. 인간의 사고, 판단 등에 포함돼 있는 조금, 약간, 보통 등에 해당하는 애매한 부분을 수치로 정량화시켰기 때문에 이를 가전제품에 적용하면 기기가 이를 판단, 처리해준다.> (1990.10.27. 매일경제)

이듬해 삼성전자와 금성사는 흡입되는 먼지의 변화를 인식해 흡입력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퍼지청소기’를 차례로 출시했다. 그러나 관심만큼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같은 해 걸레질을 하는 한국식 청소법을 적용한 물걸레 청소기가 개발돼 인기를 끌었다. 1992년 청소기 보급률은 30%대에 들어섰다. 1993년엔 문턱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본체에 바퀴를 단 청소기도 출시됐다. 청소기 사용 가구가 늘어나면서 소음이 문제가 됐다.

이후부터는 소음을 없앤 청소기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 됐다. 1994년 삼성전자가 소음을 4분의 1로 줄인 ‘잠잠’을, 1997년 금성사에서 이름을 바꾼 엘지전자가 ‘쉿’을 출시했다. 그러나 모터로 공기를 빨아들이는 방식의 청소기 특성상 소음을 줄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요즘도 밤중에 청소기를 돌리는 것은 ‘비매너’로 꼽힌다.

# 청소기는 청소시간을 줄였을까?

청소기는 정말 청소시간을 줄였을까? 엄마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옛날에는 금방 했어. 방이든 마루든 넓지가 않고, 집안에 살림이 거의 없으니까 청소할 데가 없었지. 다섯 살짜리가 할 수 있을 정도니 말 다했지 뭐. 그리고 걸레질을 해도 까만 때가 안 나왔어. 지금은 잠깐만 문 열어놔도 걸레가 새카매져. 자동차 매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엄마가 직관적으로 한 이야기는 꽤 일리가 있다. 과학기술 발달로 가전제품이 좋아짐과 동시에 관리해야할 물건과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이 늘어났다. 청소 영역에선 먼지와 때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청결과 위생의 높은 기준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청소기를 돌렸다고 해서 청소가 끝나는 게 아니란 뜻이다.

엄마 말대로 세상이 깨끗해진다면 모를까, 앞으로도 청소시간은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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