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적도와 영종도, 강화도 등지 1919년 독립운동 활발
인천연구원, 8·15 75주년 맞아 인천의 독립운동 조명

인천투데이=이보렴 기자│올해는 8·15 광복 75주년이다. 인천은 어떤 독립운동이 진행되고 있었을까

인천연구원은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지난 14일 ‘인천의 독립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덕적도, 강화도 등지에서 진행됐던 독립운동을 소개했다.

인천의 독립운동은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 1919년 3월 8일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이었던 김명진·이만용·박철준 열사는 당시 독립운동을 저지하려는 경찰과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학교로 들어가 2층에 가설해 놓은 실내 도입 전선을 절단하고 수화기를 박살냈다. 이 일로 김명진 열사는 1919년 치안유지법 위반, 주거침입, 전선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시작되던 당시 인천에서는 3월 7일부터 만세 시위행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8일에 시내 각지에서 독립선언서가 다수 배포됐으며 9일 기독교도와 청년학생들이 주도해 약 300여 명이 만국공원에 집결했으나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10일에는 시민과 학생 200명이 모여 시내 중심가에서 만세시위를 감행했다. 이후 27일에는 조선인들의 가게에 비밀리에 조선독립신문이 배부되기도 했다.

덕적도에서도 주민 60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진행했다. 서울 성경학원에 재학중이던 이동웅 열사는 3·1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독립선언문 한 장을 버선목에 감추고 고향인 덕적도로 내려왔다. 이동웅 열사는 덕적도의 청년 이재관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고 이재관 열사는 이를 정명윤 열사에게 보여줬다. 이때 임용우 열사도 김포지구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고 김포구청을 습격한 뒤 도주해 덕적도에 돌아와 있었다. 이동웅·이재관·임용우 열사들은 인천경찰서 덕적주재고에 통고 후 4월 9일 주민들과 진리 송정마을에 모여 만세운동을 벌인다. 이날 임용우·이재관 등은 체포됐는데 임용우의 경우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 고문으로 옥중 순국했다.

영종도 용유동 3·1만세운동기념비 (사진제공 인천 중구)
영종도 용유동 3·1만세운동기념비 (사진제공 인천 중구)

영종도의 3·1운동은 3월 28일 일어났다.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열사는 혈성단이라는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고 28일에 거사할 것을 결의했다. 광목으로 큰 태극기를 만들고 혈성단 4명의 이름을 각각 기입해 부근 남복리, 거잠리, 을왕리, 덕교리 등을 다니며 글을 아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혈성단 4명을 비롯해 윤치방·김윤배·윤보신 등이 주동이 돼 군중 150여 명이 관청리 광장에 모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관청리를 향해 시위행진했다. 그러나 일제에 저지로 관련자 전원이 피체돼 2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강화지역의 3·1운동은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한 달 동안 강화 13개면 전 지역에서 일어났다. 강화의 유봉진 열사는 3월 8일 온수 감리교 목사의 집에서 황유부·황도문과 함께 회합해 만세운동을 함께 할 동지를 규합했다. 이들은 18일 강화 읍내 장날에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했다. 18일 오후 2시 선봉대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군중들이 합세했다. 시위 군중은 시장에서 향교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했다. 향교 앞에서 유봉진과 고익진은 ‘나라를 되찾자’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군청 앞에 모인 군중의 수는 5000~6000명이었다. 시장에 가득찬 인원은 1만 명, 읍내에는 전체적으로 2만 명 이상의 시위대를 이루었다.

강화 3·1운동 사건과 관련해 일제에 기소된 사람은 모두 39명이다. 그 중에 유봉진·염성호·유희철·장동원 등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강화 3·1독립운동기념비 (사진제공 강화군)
강화 3·1독립운동기념비 (사진제공 강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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