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부영 인천여성회 사무처장
인천평화복지연대 사회복지위원

류부영 인천여성회 사무처장
류부영 인천여성회 사무처장

인천투데이코로나19와 함께 연일 계속되는 이상기후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 와중에 얼마 전 SNS에서 심한 폭우 속에 파라솔을 펴고 좌판에서 채소를 파는 노인의 사진을 봤다. 이미 인터넷상에 많이 떠돌고 있는 사진이었다. ‘자연재해’ 속 ‘가난한’, ‘여성’, ‘노인’의 사진에 ‘불쌍하다’, ‘안쓰럽다’ 등으로 반응하는 많은 사람의 댓글을 보며 나는 공감보다는 근래 벌어진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얼마 전 방송인 샘 오취리는 인종차별에 마땅한 문제제기를 했다. 하지만 그가 흑인이기에, 외국인이기에 한국인들은 ‘건방진 훈계질’로 받아들였고, 그런 여론에 쫓기어 그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흑인 분장이 여전히 개그 소재로 쓰이는 것을 비판한 방송인 샘 해밍턴에게 오취리만큼의 비난 댓글이 쏟아지지 않은 것은 그가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기 때문일까?

일본군 ‘위안부’ 구술집 일본어판이 발간된다는 반가운 기사를 보았다. 2012년에 ‘들리나요? 열두 소녀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한국판과 2014년에 영문판이 발간됐고,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중단된 일본어판 발간에 착수한다는 보도였다.

그 기사를 보며 나는 한국판 제목 ‘열두소녀’가 영문으로는 ‘comfort women’으로 번역된 표지사진이 눈에 들어왔고, 왜 한국에서는 ‘위안부’가 ‘소녀’로 상징되고 표현되는가에 생각이 멈췄다. 사람들은 누가 봐도 인정되는 약자의 취약한 모습을 동정하며 자원을 내어준다.

하지만 그 약자가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너무나 쉽게 그 마음을 거둔다. ‘어디 감히’라는 감정이 발동되면서 약자는 계속 약자처럼 굴어야지 마음을 써줄 요량인가보다.

‘위안부’도 순수하고 힘없는 소녀라는 약자 이미지여야만 그 피해자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위안부’상은 디자인이 바뀌어도 소녀의 모습으로만 제작된다. ‘위안부’였던 고 김순악 할머니는 억울하게 끌려간 소녀의 이미지가 아닌 자신의 인생 전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 오랜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보편적 복지를 이야기할 때 자주 따라 붙는 우려의 목소리가 ‘도덕적 해이’와 ‘포퓰리즘’이다. 이러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복지서비스 수혜 대상자는 여러 서류와 근거로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한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수많은 구직활동을 했음에도 실업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에 이르는’ 폭행 또는 협박이 존재했음을 증명해야만 가해자가 강간죄나 유사강간죄로 처벌받게 할 수 있다. 도저히 못 버틸만큼의 협박과 폭력에 놓이지 않았으면, 또 그에 저항하지 않았으면 피해자로 인정받기 어렵다.

복지 대상자, 약자, 피해자가 언제까지 스스로 노력하고 증명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다. 사회가 만들어온 구조적 모순에 책임지는 것을 바탕으로, 가난과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내는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줘 이들이 시민으로, 인간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 올 것인지, 조금은 답답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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