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조화는 없었지만 인천 정치권과 강화사람 추모 줄이어
정부에 ‘서훈’ 신청 안하기로… 강화 ‘죽산’ 평화역사 교육 예정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죽산 조봉암 서거 61주기 추모제가 7월 31일 서울 망우리공원에서 열렸다. 오늘도 추모제는 어김없이 오전 11시에 열렸다.

죽산은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에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와 유족회가 매년 11시에 추모제를 지낸다.

서거 61주기인 올해도 죽산의 마지막 명예회복이라 할 수 있는 서훈 추서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까지 3년째 추모제를 지켜온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도 올해는 오지 않았다. 

죽산과 함께 진보당 활동을 하며 죽산을 마지막까지 지킨이들도 세월이 흘러 늙었고,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죽산과 살아 생전 함께 활동한 죽산기념사업회 김대식 고문과 김창식 고문은 입술을 꾹 다물고 추모제를 지켰다.

죽산 조봉암 서거 61주기 서울 망우리공원 추모제.
죽산 조봉암 서거 61주기 서울 망우리공원 추모제.

죽산기념사업회와 유족회는 코로나19 지속에 따른 감염 확산을 우려해 공식 추모제를 진행하지 않고, 기념사업회와 유족회가 간소하게 추모제를 지냈다. 대신 인천시가 올해도 추모제를 후원하고, 박남춘 인천시장이 직접 참석해 죽산을 추모했다.

기념사업회와 유족회는 추도사 등을 생략한 채 묵념하고 헌화하는 것으로 간소하게 추모제를 지냈다. 기념사업회가 유족회가 추모제를 간소하게 치르기 위해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았으나, 인천에서 많은 이들이 참여해 죽산을 추모했다.

박남춘 인천시장과 신은호 인천시의회 의장이 참석했고, 국회의원 중에선 민주당 김교흥(인천서구갑) 국회의원이 참석했으며, 홍미영 전 부평구청장도 참석했다.

진보정치권에선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와 김응호 정의당 인천시당위원장, 김재연 진보당 대표와 용혜랑 진보당 인천시당위원장이 참석했으며, 민선 6기 유정복 시장 때 정무부시장을 지낸 조동암 전 부시장 또한 올해도 참석했다.

죽산의 고향인 강화에서는 창녕 조씨 일가와 강화군시민사회단체가 소형버스 한 대를 빌려 단체로 참여해 61주기 추모제를 빛냈다.

참석하진 않았지만 민주당에서 인천시당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관석(인천남동을) 국회의원과 송영길(인천계양을) 의원, 박찬대(인천연수갑) 의원이 조화를 보냈고, 정의당에선 심상정(경기고양갑) 대표와 배진교(비례) 원내대표가 조화를 보냈다.

박남춘 인천시장이 죽산 조봉암 서거 61주기 추모제에 참석해 헌화하고 있다.
박남춘 인천시장이 죽산 조봉암 서거 61주기 추모제에 참석해 헌화하고 있다.

죽산은 1899년 강화군 선원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강화 3ㆍ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했다. 죽산은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해 일제 때 사회주의 계열 항일혁명가로 활동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1939년까지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소 후 인천에 정착했다. 박헌영과 갈등 끝에 공산당과 선을 긋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제헌 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죽산은 사회정의와 복지국가, 평화통일을 주창하다가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누명을 쓰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산은 서거 53년 만인 지난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공로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죽산이 잠시 일제와 타협했다는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1941년 12월 23일 자 신문에 ‘인천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사는 조봉암 씨가 국방헌금 150원(현재 9000만 원)을 냈다'는 단신 기사를 토대로 추서를 안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죽산의 주소는 부평이었고, 그만한 성금을 낼만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국가보훈처는 2017년 유족에게 서훈에 필요한 보완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죽산기념사업회는 “당시 죽산의 사회적 위상을 고려했을 때 죽산이 그만한 돈을 냈으면 아마도 일제가 이를 이용하기 위해 대서특필해야 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단신 기사로 처리했다”며, 총독부 기관지 기사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반박했다.

기념사업회는 지난해부터 더 이상 정부에 서훈 추서를 신청하지 않고 있다. 2018년 서훈 신청도 기념사업회와 유족이 신청한 게 아니라, 정부가 자체적으로 검토한 뒤 추서를 보류했을 뿐이다.

죽산기념사업회, 유족회와 더불어 죽산 명예회복에 앞장선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이사장이 헌화하고 있다.
죽산기념사업회, 유족회와 더불어 죽산 명예회복에 앞장선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이사장이 헌화하고 있다.

죽산은 독립유공 못지않게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죽산이 추진한 토지개혁은 강제로 땅을 뺏는 농지개혁이 아니었다. 정부가 지주한테 토지를 매입할 때 현금을 준 게 아니라 정부 농지채권을 줬다. 그런데 이 채권으로 땅을 살 땐 시중 가격의 30%밖에 안 됐다.

반면 일본 적산(=적의 재산)을 매입할 땐 채권 가격 그대로 인정해줬다. 즉. 땅을 사는 것보다 적산을 매입하는 게 나았다. 이 과정을 통해 남한 지주가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토대가 마련됐다. 반면, 농민들에겐 무상에 가깝게 공급했다. 그렇게 1950년 4월부터 농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시작됐다.

죽산의 온전한 명예회복은 그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유공에 대한 서훈 추서에 있지만,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서훈 추서는 올해도 안됐지만 인천에서는 죽산을 기리는 사업이 확산하고 있다. 인천시가 올해 초 1차 어록을 펴낸 데 이어 2차 어록을 발간을 준비 중이며, 인천시교육청은 죽산의 얘기를 담은 지역화교과서를 내년에 펴낼 예정이다.

올해 강화도를 평화생태역사교육지구로 지정하고, 이를 주제로 한 초등학교 3학년 대상 지역화교과서를 제작해 내년에 교육할 예정이다. 이중 강화도의 평화와 역사 이야기를 다룰 때 죽산 조봉암 관련하 이야기를 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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