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밤쉘(Bombshell)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제이 로치 감독|2020년 개봉

[2020년 7월 22일 CGV인천 관람] 4년 전 미국 보수성향의 언론사 <폭스 뉴스> 여성들이 일을 냈다. 직설적인 보수 성향 논조로 폭스 뉴스 케이블을 성장시킨 로저 에일스 대표를 성폭행 혐의로 고발하고 결국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든 것. 이 사건은 이후 할리우드의 저명한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을 영화계에서 추방시킨 할리우드발 미투 운동으로 확장됐다.

영화 ‘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은 4년 전 폭스사의 여성 방송인들이 방송사 대표 로저 에일스의 성폭력 가해 사실을 용기 있게 폭로했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다.

폭스 뉴스의 중견 앵커 그레천(니콜 키드먼)이 해고 직후 로저(존 리스고)를 성폭력 혐의로 고소하면서 잘나가던 폭스 뉴스엔 거대한 태풍이 몰아친다. 동료들과 관계가 썩 좋지 않았던, 사회성 제로인 그레천의 고소는 초반에는 별 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할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그레천에게 동조하지 않았고, 명망 높은 로저에게 반기를 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레천을 비난하거나 로저를 지지하는 여성 직원들의 움직임이 더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폭풍전야의 거짓 태평이었다. 로저가 폭스 뉴스 대표를 맡기 전부터 저질렀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하나 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은 폭스사를 떠난 전 여성 앵커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결국 당시 폭스 뉴스에서 가장 잘 나가던 여성 앵커 메긴(샤를리즈 테론)과 이제 막 야망을 키우기 시작한 신참 앵커 케일라(마고 로비)까지 폭로에 합세한다. 메긴의 폭로 앞에는 이미 여성 22명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영화 제목 그대로 폭발적인 밤쉘(Bombshell)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그래천, 메긴, 케일라는 전형적인 피해자와는 거리가 있다. 미국 보수를 대표하는 방송사 직원답게 (비록 트럼프의 막말에 맞서 대거리를 하긴하지만)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에 실력까지 출중하고, 성공하고자하는 야망에 불타는 여성들이다. 겉모습만 보기엔 가만히 숨죽여 피해를 당할 것 같지 않은 이들이다.

그러나 직장 내 성폭력,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그렇게 성공 지향적인, 공격적이기까지 한 여성들마저 피해자로 만든다. 아니, 직장에서 살아남고자 하면 할수록 성공하고자 하면 할수록 피해자가 되기 쉽게 만드는 것이 직장 내 성별 위계다.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이 곧 생존과 자신의 경력과 성취에 위협이 되기에 밝히기 더 어려운 것이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다.

“한참 지난 과거 일을 이제 와서 밝히는 이유가 뭐냐?” “(가해자) 반대세력의 공작 아니냐?” “부당한 이득을 뜯어내려는 수작(꽃뱀) 아니냐?” “성폭력이 아니라 연애한 것 아니냐?”

영화에 나오는 대사들은 마치 지금의 한국 현실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다. 우리는 지금도 피해자에게 무수히 쏟아지는 2차 가해의 말을 목도하고 있다. 가해자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가해자의 업적이 크면 클수록 가해 사실에 대한 단죄와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보다는 피해자의 무결함을 증명하라는 요구가 더 강하다.

순수하고 무결한 피해자란 없다. 흠결이 있든 없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켜야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엄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엄을 해쳤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과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진실이다.

마찬가지로 오로지 사악한, 성폭력 가해자가 되기에 마땅한 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성폭력 가해자인 로저는 무수히 많은 미담을 가진 CEO였다. 폭스 뉴스 채널을 미국 케이블 뉴스의 탑 자리에 올린 능력자이기도 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성 대표(권력자)의 성취가 약자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시스템을 점검하고 고쳐나가야 할 근거일 뿐이다.

영화는 4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2020년 현재 한국의 현실과 기막히게 조응한다. 영화 속 그녀들의 폭로가 이후 할리우드로, 전 세계로 퍼져나간 미투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듯, 지금 한국에서 ‘피해자의 편에 서겠다’는 무결하지 않은 존재들의 또 다른 의미의 ‘밤쉘’은, 세상을 바꾸는 폭탄선언이 될 것이다. 아니, 돼야만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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