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주민 인권활동가 소모뚜 씨

[인천투데이 조연주 기자] 250만 명. 대한민국 인구의 5%. 한국에 사는 사람 20명 중 1명은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이주민’이다. 이들은 이미 한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외노자’ ‘불법체류자’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 이주노동자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인천 부평구에서 태국음식점과 미얀마이주민협동조합 ‘브더욱글로리’를 운영하고 있는 소모뚜 씨를 만났다. 소모뚜 씨는 다문화 인권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이주노동자 방송국 대표도 역임했다.

“한국에 왔으면 이주‘노동자’에서 끝날 게 아니라 ‘사장님’ 했으면 좋겠어요. 한국 사람들이 이 말 들으면 충격 받겠지요”라며 호탕하게 웃는 소모뚜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주민 인권활동가 소모뚜 씨. 이주노동자 방송국 대표를 맡고 있다.
이주민 인권활동가 소모뚜 씨. 이주노동자 방송국 대표를 맡고 있다.

이주노동자도 한국의 일부

소모뚜 씨는 1995년 3월 한국에 왔다. 미얀마(버마)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에는 일자리가 있었고 ‘민주주의’도 있었다. 당시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참 씩씩했다. 물질적 풍요뿐 아니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신감이 참 부러웠다. 1987년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냈고, IMF 외환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얀마를 떠올렸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위축돼있는 미얀마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왜 우리는 한국 사람들처럼 하지 못할까, 부러워했다.

그러나 한국을 알면 알수록 부러움은 실망으로 변해갔다. 2003년, 그는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추방하려는 한국 정부와 맞서 싸워야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단속과 추방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한순간에 ‘치워버려야 할 사람들’로 전락했다. 1988년 올림픽 이후 부흥하던 한국 경제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궂은일을 맡아 뒷받침한 이주노동자들이 이런 취급을 받아선 안 되는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열흘 만에 1233명이 연행됐고, 606명이 강제로 출국됐다. 이 과정에서 1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당시 85일간 농성했다. 그리고 농성 끝에서 ‘이주민 인권활동가’라는 새로운 삶을 만났다.

가슴 아픈 시간들이었지만, 2003년의 사건은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서로 존재를 확인하고 부당함에 맞섰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그는 “그냥 ‘삘’이 딱 왔어요. ‘앞으로 나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삶을 살겠구나’라고요”라고 말했다.

밴드도 만들었다.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크랙다운(단속을 멈춰라)’이다. 소모뚜 씨는 여기서 리드기타와 작곡을 맡았다. 스탑크랙다운은 곳곳을 돌며 이주노동자의 삶을 노래했다. 보컬은 2018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안녕, 미누’의 주인공 미누 씨다.

소모뚜 씨는 미등록 외국인이 많아 진 이유 중 하나로 ‘산업연수생제도’를 지목했다. 산업연수생제도는 ‘저개발국 외국인에게 기업연수를 통해 선진기술을 이전하기 위한 제도’라는 허울 좋은 사전적 정의가 있지만, 까놓고 보면 ‘돈 안 내고 일 시키겠다’는 함의가 깔려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일하면 숙식을 제공받을 뿐, 노동의 대가를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사업장을 이탈한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가 많아졌다. 2002년 즈음 미등록 체류자가 약 30만 명까지 늘어, 전체 체류자의 80%에 달했다.

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뜻으로 임금의 일부를 센터에 기부하기도 한다.
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뜻으로 임금의 일부를 센터에 기부하기도 한다.

두 손으로 직접 일궈낸 ‘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

‘미등록 체류자’ 신분이 돼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내몰린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신체적ㆍ언어적 학대에 시달리는 사업장도 많다.

소모뚜 씨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처음은 봉사가 가능한 노무사ㆍ통역인과 함께 주말 상담소 형태로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소문이 퍼져 상담 요청이 쏟아졌다.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미얀마 공동체 리더들과 함께 '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를 설립했다. 미얀마 노동자들에게 월 1만 원의 후원을 부탁했다.

‘꿈이라는 건 혼자가 아니라 함께 꾸어야 이뤄진다’고 믿는다는 그에게 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곳이다. 지난해 만든 센터에서는 미얀마 노동자의 체불임금을 받아주고, 사업장에서 일어난 폭행사건 등을 해결한다. 이밖에도 한국 생활을 어려워하는 이주민이 자리 잡는 것도 도와준다.

후원회원이 점점 늘어나 최근에는 센터 사정이 좋아졌다. 센터 설립 6개월을 넘어서자 후원회원이 100명을 넘었고, 지금은 300명이 넘는다. 그래서 조금 더 큰 사무실로 이전했다. 상근자도 한 명 더 채용할 예정이다.

한 달 후원금이 400만 원 정도 된다. 체불임금을 받은 사람들은 그 일부를 감사의 뜻으로 센터에 기부하기도 한다. 센터에서 찾아주는 체불임금이 5000만~8000만 원가량이다.

다른 기관의 도움이나 개인의 후원금을 받을 때도 있지만, 핵심적 재정문제는 회원들이 스스로 해결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회원들은 함께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지키는 게 물질적 풍요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사무실을 이전할 때, 앞서 사무실을 사용한 사람이 좋은 일 한다면서 사무용품ㆍ프린터ㆍ에어컨 등을 주고 갔다. 소모뚜 씨는 “중고 가격으로만 따져도 300만 원 상당의 물품들”이라며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더니, 감사히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는 사무실을 이전할 때 앞서 사무실을 사용한 사람한테서 중고 사무용품 등을 지원 받았다.
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는 사무실을 이전할 때 앞서 사무실을 사용한 사람한테서 중고 사무용품 등을 지원 받았다.

미얀마 민주화 이룩하는 게 최종 꿈

소모뚜 씨는 2004년에 난민 신청을 하고 4년이 지나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대법원 소송까지 가서 이긴 게 2011년이다.

그는 “당시 법무부 관계자를 만나 ‘저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라고 하니까, 관계자가 ‘소모뚜 씨 같은 사람이 있어서 우리 사회가 흔들리는 겁니다’라는 말하더라고요”라며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흔들려야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한국 사람과 똑같은 노동을 해도 다른 대우를 받는 한국의 현실을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뿐 아니라 사업가로 자리 잡을 수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떠났던 한국 사람들이 한국에 이주민이 들어와 사업가를 하고 싶다고 하면 깜짝 놀란다고 덧붙였다.

그는 미얀마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지만, 한국에서 번 돈으로 미얀마 민주화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미얀마와 한국 두 곳에서 인권 활동을 하고 있어요. 하나는 한국에서 하는 이주민 인권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힘쓰는 것이죠. 미얀마 국민은 50년 동안 독재정권 아래서 살아오고 있어요. 인권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사람을 한국에서 만들어 미얀마로 돌려보내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스무 명이 넘는 활동가가 인천과 부천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고, 참가자가 수천 명이 넘는 미얀마 문화축제가 이뤄지고 있지만, 인천시는 우리 같은 존재를 모른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우리의 존재를 모른다기보다는 관심 없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인천시가 정말 ‘다문화’ 도시가 되려면 이주민과 소통하고 협업해야합니다. 지금은 부평경찰서에서 유일하게 가끔 와서 챙겨주십니다.”

인천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가장 먼저 만나는 도시이다. 그는 인천이 한국을 찾은 사람들에게 이주민과 원주민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인천의 자원을 잘 활용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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