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식 평화네트워크대표, 인천사람과문화 ‘인천마당’서 강연
“실체 없는 ‘비핵화’보다 유엔이 정의한 ‘비핵지대’ 논의해야”

[인천투데이 김현철 기자] “한국 정부가 3차 북미회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다. (중략) 한국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는 모습을 북한에 보여주는 방법이 지금으로선 최선이다. 비핵화에 대한 국가 간 정의가 다른 만큼, UN에서 정의한 비핵지대를 논의 주제로 삼아야한다. 비핵화라는 실체 없는 단어에 얽매이지 말자.”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가 지난 20일 개최한 제72회 인천마당에서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가 ‘한반도의 위기와 해법’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강조한 말이다.

정 대표는 1999년에 평화네트워크를 창립한 이래 21년간 평화운동 외길을 걸었다. 그동안 ▲한반도 시나리오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 그리고 2012년 체제 ▲핵의 세계사 ▲평화학과 평화운동 ▲사드의 모든 것 ▲비핵화의 최후 등을 집필했다.

최근에는 북미 간에 정의가 서로 다른 비핵화보다 이미 국제연합(UN)이 정의한 비핵지대를 주제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라는 책을 펴냈다.

이날 강연에선 비핵지대를 포함해 경색된 남북관계 국면을 해소하기 위해선 한미연합훈련 중단, 대북제재 해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 표명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강연 내용을 정리했다.

정욱식 대표가 인천사람과문화가 개최한 인천마당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정욱식 대표가 인천사람과문화가 개최한 인천마당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남북 평화 기회마다 한미동맹 때문에 무산”

돌이켜보면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감은 최근 몇 년 새 급격히 증가한 것이 아니다. 1990년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탁구에서 남북단일팀을 구성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중국을 꺾고 우승했을 때도 분위기는 좋았다.

2000년에는 사상 최초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회담을 마치고 서울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선 북방한계선 관련 논의와 함께 서해평화특별지대를 만들기로 하는 등, 한반도 평화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수차례 찾아온 한반도 평화 기회가 무산된 이유를 한미동맹에서 찾을 수 있다. ‘공미형 친미주의’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 않은데 안 들어주면 뭔가 문제가 생길 것 같아하는 불안감을 지칭하는 말이다.

한미동맹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예를 들면, 주한미군 감축설이 나올 때 이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를 보면 아쉬움이 많다. 우리나라 군사력은 세계 6위로 평가받고 있는데, 철수도 아닌 감축설만 나와도 깜짝 놀랐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그래도 힘든 한반도 평화가 더 어려워지겠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한국 정부가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어 제대로 된 평화정책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북핵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 따져볼 필요 있어”

북핵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만 30년이 됐다. 대부분의 사람이 북한이 몰래 핵무기를 만들다가 미국에 발각되면서 이 문제가 시작됐다고 생각하지만, 원인 제공을 미국에서 했다.

1991년부터 북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동유럽의 체제 전환과 독일의 통일로 냉전이 종식되는 시기였다. 미국 내부에선 두 가지 흐름이 충돌했다. 아시아 주둔 미군을 대폭 감축해야한다는 의견과 아시아에서 미국의 경쟁세력이 부상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주한미군 3단계 감축 계획이 논의ㆍ입안돼 미 행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한미동맹을 크게 바꾸기 위한 계획이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이 바로 아빠 부시(=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였다.

당시 딕 체니, 월포위츠 등이 ‘방위 계획 대강’이라는 문서를 만들었는데, 이 문서의 핵심은 냉전에서 승리했다고 들뜨기보다 21세기도 미국의 세계로 만들기 위해선 주한미군의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3단계 감축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북한의 위협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가장 좋은 명분이 바로 북핵이다. 이를 핑계로 1992년 10월 팀 스피릿 훈련을 재개한다. 주한미군 감축 계획도 철회된다. 이로 인해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며 1994년 6월 전쟁 위기까지 갔다.

“플루토늄 불일치 문제의 진실 알고 난 뒤 아쉬워”

1992년에 접어들면서 북핵과 관련한 많은 의혹이 제기됐지만, 한미 당국은 물밑에서 조율한 끝에 팀 스피릿 훈련을 중지하기로 하고,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기로 한다.

이때 북한이 IAEA에 신고한 플루토늄은 90g이었다. 플루토늄은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물질이다. 핵폭탄 1기를 만들기 위해 플루토늄 약 5kg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IAEA 사찰 직후 미 국방부(펜타곤)와 중앙정보국(CIA)이 ‘북한이 기만 계획을 갖고 있다’며 이상한 얘기를 했다. 북한이 IAEA에 신고한 내용은 엉터리이며,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플루토늄은 10kg이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플루토늄 생산량 불일치 문제다.

플루토늄 불일치 문제의 진실을 알기 위해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 등을 찾아 읽었고, 미 국무부 관계자들도 만나 대화한 결과, 플루토늄 생산량 불일치 문제는 미국의 과대포장에서 비롯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2008년 6월, 북한당국에서 1만8000페이지에 달하는 핵시설 가동 일지를 미 대표단에 전달했다. 2007년까지 핵시설을 가동한 결과를 담은 문서였다. 미 대표단이 이 문서를 분석한 결과, 당시 북한이 IAEA에 신고한 플루토늄 생산량은 90g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같은 결론은 아들 부시(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 당시인 2008년 ‘악의 축’으로 지목했던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삭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미국은 북의 플루토늄 생산량을 과대포장하면서 한미동맹 강화로 미사일방어체계(MD)를 추진할 수 있는 근거를 얻었다.

개성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장면(출처 조선중앙통신)
개성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장면(출처 조선중앙통신)

“코로나19로 어려워진 한미합동훈련 이참에 중단”

촛불로 탄생한 정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문재인 정부도 국민들의 기대만큼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정권 초기 4ㆍ27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등의 성과로 만든 개성공동연락사무소 마저 폭파됐다. 한국 정부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한미합동훈련 중단이다.

2019년 하노이 북미회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노란 봉투를 전달했다. 미국이 생각하는 비핵화의 모습이 담긴 문서였다. 언론에선 빅딜 문서라고 표현했지만, 김정은 위원장에겐 항복 문서나 다름 없었다.

회담 결렬 3주 후 미 국무부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문서를 언제 전달했느냐고 물으니, 미 국무부 관계자는 ‘회담 당일 전달했다’고 말했다. 회담을 진정성 있게 진행하기 위해선 실무회담이나 최소한 회담 전엔 전달해야했다. 미국의 한반도 평화 의지에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이 문서는 한국 정부에도 전달됐는데, 마찬가지로 하노이 회담 후였다. 개성공동연락사무소 개설 후 미국의 ‘한미 간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만들어진 한미워킹그룹의 필요성에도 의문이 간다.

미 국무부 관계자들에게 ‘노란봉투를 전달할 때 북한이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느냐’고 물었을 때, ‘어느 때보다 강력한 대북제재가 가해지고 있어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제재는 일종의 고문이다. 고문 방식은 당장 효과를 볼 수 있어도 지속될수록 당하는 쪽에서 부당하다고 느끼며 끝까지 저항하는 경우가 많다. 제재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북핵이 발전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다. 제재는 실패한 접근법이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정권 초기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대북제재를 너무 쉽게 동의해줬다. 최소한 논쟁은 해야 했다. 그 이후 한국은 금강산과 개성공단을 제재 예외 대상으로 지정하자는 주장밖에 하지 못하게 됐다. 북미회담의 핵심도 결국은 대북 제재 완화인데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셈이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대선 전 3차 북미회담 얘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북미 양쪽 모두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으나 문은 닫아놓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가 3차 북미회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다. 어차피 코로나19로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이참에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고 한국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는 모습을 북한에 보여주는 방법이 지금으로선 최선이다.

비핵화에 대한 국가 간 정의가 다른 만큼, UN에서 정의한 비핵지대를 논의 주제로 삼아야한다. UN에서 정의한 바로 세계 116개국이 비핵지대에 속해있다. 비핵화라는 실체 없는 단어에 얽매이지 말자.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이 힘을 얻기 위해선 운전자의 목적지와 경로가 확실해야한다. 한국 정부가 먼저 확실한 목적지와 경로인 비핵지대를 논의 주제로 던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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