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 파니 멘델스존과 펠릭스 멘델스존(1편)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1805년 11월 14일, 함부르크 인근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엄마는 아기의 작은 손을 보며 말했다. “바흐의 푸가를 연주하기에 완벽한 손가락이야.” 피아니스트의 손을 타고난 아기의 이름은 파니 멘델스존이다.

파니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엄청난 부를 소유한 은행가였고, 엄마 레아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특히 레아는 4개 국어에 능통한 지식인이었는데 당시에는 여성의 지적 활동이 금기시됐기에 이를 숨겼다. ‘너무 똑똑한 여자는 남편의 기를 죽일 수 있다’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었다.

레아는 네 살이 된 파니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당시 부르주아 여성에게 피아노 연주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필수과목 중 하나였다. 이 무렵 파니에게 남동생이 생겼는데 바로 펠릭스 멘델스존이다. 어느 결혼식장에서나 울려 퍼지는 ‘결혼행진곡’을 만든 그 멘델스존 말이다. 파니는 날마다 펠릭스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해줬다. 펠릭스 아래로 레베카와 파울이 더 태어나 모두 사남매가 됐다.

부르주아 집안에서 다양한 교육 받는 천재 남매

파니 멘델스존과 빌헬름 헨젤.(사진출처ㆍ위키피디아)
파니 멘델스존과 빌헬름 헨젤.(사진출처ㆍ위키피디아)

1812년, 멘델스존 부부는 함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멘델스존 집안은 유대인으로 유대교를 신봉했다. 하지만 당시 유대교를 탄압했기에, 혹여 자식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것을 염려한 부부는 본인들은 유대교로 남았지만, 자식들은 1816년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렇게 멘델스존이라는 성은 멘델스존 바르톨디가 됐다.

파니와 펠릭스는 부잣집 자식들답게 집 안에서 고전 문학ㆍ수학ㆍ역사 등 각 분야 전문가의 교육을 받았다.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울 하이제의 아버지인 언어학자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하이제에게 언어를, 비곳(Marie Bigot)ㆍ베르거(Ludwig berger)ㆍ훔멜(Johann Nepomuk Hummel)ㆍ첼터(Carl Friedrich Zelter) 등 당대 최고 음악가들에게 음악을 배웠다. 특히 첼터한테서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접했는데, 이는 파니에게 음악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쳤다.

같이 공부하고 연주하면서 천재 남매의 교감은 점점 특별해졌는데, 대문호 괴테와 가까웠던 첼터는 그의 음악노트에 ‘파니가 펠릭스보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적었다. 파니는 1817년 12세에 부모의 결혼기념일에 열린 연주회에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 실린 곡 24개를 안 보고 연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파니와 펠릭스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엄격하게 짜인 교육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자유시간이란 것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희곡에도 관심을 보인 남매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각색해 ‘정원에서의 시간’이나 ‘티타임과 눈’이란 제목으로 연극을 만들어 집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런 작업은 훗날 펠릭스의 명곡인 관현악곡 ‘한여름 밤의 꿈’ 탄생의 씨앗이 됐다.

아버지의 차별 교육…파니, 그녀가 가난했더라면

1819년, 파니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생일 선물로 자신이 만든 첫 번째 작품인 가곡 ‘오 당신의 음색이 경쾌하게 떨린다’를 선보였다. 아브라함은 파니가 교양 있는 여자로 자라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여인이 되길 바랐다. 파니가 어떤 재능을 가졌건 그건 아브라함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파니의 15세 생일날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그런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아마 펠릭스에게 음악은 직업이 될 수도 있겠지만, 너에게 음악은 하나의 장식품 같은 것일 뿐, 그것이 네 삶의 중심이 될 수도 돼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펠릭스의 야심과 소망을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겠지. 펠릭스가 음악을 천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야. 펠릭스와 반대로 너는 이러한 문제에 관해 항상 훌륭하고 분별력 있는 모습을 보여 왔다. 펠릭스가 칭송받을 때 너 역시 기쁨을 느끼지 않느냐. (중략) 그러니 앞으로도 분별 있게 처신해라. 그것이 여자다운 것이며, 여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로운 일이란다.”

아브라함의 차별은 단지 여성이라서 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클라라 슈만이 전문 피아니스트로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에, 파니도 얼마든지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문제는 파니가 부르주아 집안의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클라라가 모차르트처럼 아버지에 의해서 철저히 연주자로 만들어졌다면, 아브라함은 파니가 ‘여성의 소명’에 따라 ‘가정주부의 역할’에 충실하길 바랐던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1838년 런던 <아테나움>지 기사에는 그녀가 가난했더라면 그 재능이 전 세계에 알려졌을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대문호 괴테가 인정한 음악 신동, 펠릭스

파니 멘델스존.(사진출처ㆍ위키피디아)
파니 멘델스존.(사진출처ㆍ위키피디아)

파니와 펠릭스의 수업이 나뉘기 시작했다. 펠릭스는 역사ㆍ수학ㆍ지리ㆍ독일어 등을, 파니는 그림ㆍ무용ㆍ윤리와 가정을 잘 꾸리는 방법 등을 공부했다. 펠릭스가 수업하는 방 문 뒤에서 펠릭스의 수업을 엿듣는 파니를 발견한 레아는 아브라함을 설득해 파니도 펠릭스나 파울의 수업 시간에 동참하게 했다.

그런데 두 남매가 떨어져 수업을 받는 동안에도 펠릭스는 파니에게 그날그날의 수업 내용을 알려줬다. 부모는 이를 몰랐다. 파니는 아브라함의 교육 방침에 겉으론 순응하는 듯 보였으나 다양한 공부와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펠릭스의 음악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조언자가 됐다. 펠릭스는 파니의 의견을 듣기 전엔 어떤 악상도 쓰지 않을 만큼 파니에게 의존했다.

1821년, 첼터가 펠릭스를 데리고 바이마르로 가서 괴테에게 소개했다. 괴테에게 한 번이라도 선보이고 싶은 신동들이 줄을 선 가운데, 70대 괴테는 신동들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 첼터가 ‘모차르트처럼 신동으로 알려진 사람은 많지만, 마지막에 그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이유다.

펠릭스의 연주를 들은 괴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펠릭스가 모차르트보다 더 뛰어난 음악가’라고 단언했다. 괴테는 모차르트가 7세 때 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 아이가 처음 보는 악보를 앉은 자리에서 연주하고 작곡하는 것은 거의 기적이라 할 정도군.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난 믿지 못했겠지…. 자네 제자가 이미 이룬 성취를 당시의 모차르트와 비교하자면, 다 자란 어른의 교양 있는 대화를 어린아이의 혀짤배기소리에 비교하는 것과 같네.”(‘멘델스존, 그 삶과 음악’ 인용)

7세의 모차르트와 12세의 펠릭스를 단순 비교하긴 어렵다. 다만 많은 평론가는 1820년대 10대의 펠릭스가 만든 음악이 개성과 성숙도 측면에서 모차르트를 능가했다는 데에 동의했다.

왕실 화가 빌헬름 헨젤과 사랑에 빠진 파니

12세의 펠릭스 멘델스존.(요제프 베가스 그림)
12세의 펠릭스 멘델스존.(요제프 베가스 그림)

이 해에 파니는 베를린의 예술전시회장에서 왕실 화가인 빌헬름 헨젤을 만난다. 빌헬름은 첫눈에 파니에게 반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레아는 그가 가난한 성직자의 아들인 데다가 그의 여동생이 천주교 신자인 것을 문제 삼아 서신왕래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파니는 빌헬름의 사랑으로 행복했고, 그가 말이 통하는 상대여서 좋았다. 빌헬름은 베를린 예술원 장학생으로 선발돼 로마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어 로마로 떠났다. 이 잠시의 이별은 두 사람의 마음을 더 뜨겁게 만들었다.

파니는 빌헬름의 누이가 쓴 시 ‘여름 장미’에 곡을 붙여 자신의 마음을 담은 가곡을 만들었다. 달콤한 상실감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가사는 파니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여름 장미가 피어나고 꽃냄새가 내 주위를 향기롭게 감도네. 꽃은 시들어가고 이제 내게는 남아 있는 꽃이 없다네.”

파니는 레아를 도와 일요콘서트를 준비했다. 얼마 되지 않아 멘델스존 집안에서 열린 이 음악회는 베를린 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됐다. 이곳에는 괴테와 하이네, 철학자 헤겔, 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가했다. 이런 사람들을 불러들일 수 있는 가문이었으니, 그 위세가 얼마나 넘쳤는지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이 무대에서 파니와 펠릭스는 피아노를, 파울은 첼로를 연주했고, 레베카는 노래를 불렀다. 파울과 레베카는 아무리 노력해도 파니와 펠릭스처럼 될 수는 없었다. 형제자매 간에도 질투는 있는 법. 훗날 레베카는 “오빠와 언니가 예술가로서 내 명성을 훔쳤다. 펠릭스와 파니 옆에선 어떤 인정도 바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세이렌의 노래 인용) 다음 회에 계속.

[참고서적] 세이렌의 노래 | 이디스 재크 지음, 배인혜 옮김 | 만복당
멘델스존, 그 삶과 음악 | 닐 웬본 지음, 김병화 옮김 | 포노
더 클래식 둘 | 문학수 지음 | 돌베게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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