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여름철 외출할 땐 날씨가 맑아도 우산을 챙긴다. 우리나라는 연 강수량의 70%가 여름에 집중되기 때문에 해가 쨍쨍하다가도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날이 종종 있다. 이럴 땐 양산과 우산을 겸한 양우산이 요긴하다. 자외선 차단과 방수 기능이 있어 햇빛과 비를 둘 다 막아낸다.

양우산이 나온 지는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흐린 날이면 3단 양산을 꼭 가지고 다녔다. 그 양산은 쿠웨이트에 일하러 간 아빠가 1981년에 귀국할 때 사 온 것이다. 어린 내가 봐도 그 양산은 낯설고 고급스러웠다. 가난한 집의 초라한 세간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우산 이미지.(출처 아이클릭아트)
우산 이미지.(출처 아이클릭아트)

우리 집에 있던 우산들은 양산과는 비할 수 없이 투박하고 무거웠다. 그마저 제일 튼튼한 건 아빠가, 그다음 멀쩡한 건 언니가 쓰고, 물건을 잘 챙기지 못했던 난 제일 허름한 우산을 썼다. 비가 올 때마다 살이 휘거나 때가 많이 탄 우산을 쓰는 게 영 못마땅했다. 그땐 우산이 그렇게도 귀했던 걸까. 엄마에게 물었다.

“그럼. 내 생각에 제대로 된 우산이 나온 건 늬들 중학교 다닐 때쯤이었어. 그 전에 것은 비싸기만 하고 질이 좋지도 않았지.”

나는 1990년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날이 흐리면 책가방에 3단 우산을 넣어가지고 다닌 기억이 난다. 동인천 굴다리 근처에 협립우산이라는 가게가 있었다. 엄마는 집에서부터 버스로 40분이나 걸리는 그곳에서 식구들 우산을 샀다.

“조금 비싸도 튼튼한 걸 사야 오래 쓰니까. 그게 돈 아끼는 방법이더라고. 그래서 거기까지 가서 샀지.”

고급 기술이 필요한 가전제품도 아니고, 서민층이 질 좋은 우산을 쓰기 시작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니 의외였다. 엄마가 어렸을 땐 대체 어떤 우산을 쓰고 다닌 걸까.

“제일 오래된 건, 종이우산이었어. 문종이(창호지)에 콩기름인지 하여튼 기름을 몇 번 덧입혀서 말리고 말리고 한 거야. 생긴 건 지금 우산하고 비슷해. 살이 둥글지 않고 곧지. 대나무 살이니까. 손잡이는 기억 안 나. 그냥 대나무였던 거 같아. 근데 요즘 것만큼 오래 못 써. 바람이 세게 불면 하루만에도 다 망가지고. 살이 부러져도 머리 가릴 정도만 되면 그냥 쓰고 다녔어. 새 거 쓴 사람보다는 살이 몇 개 빠진 상태로 쓰는 경우가 많았지. 근데 우산보다도 비료 포대를 많이 썼어. 비닐로 된 거. 머리부터 등만 젖지 않게 쓰는 거야. 비 오면 어차피 다 젖으니까. 종이우산 써도 그까짓 거 뭐, 옛날엔 십 리 이십 리 길은 걸어 다니는 게 예사니까, 비 오면 안 젖을 수가 없어.”

비 오는 날 비에 안 젖을 수 없다는 말이 내겐 어쩐지 낭만적으로 들렸다. 이런 내게 엄마가 일침을 놨다.

“난 비 오면 하나도 좋을 게 없었어. 비 오는 날에 어렸을 땐 모시하고, 좀 커서는 나무하러 갔거든. 원래 누가 와서 나무 잘라 갈까 봐 산 주인들이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가 쫓아오고 그래. 근데 비 오는 날엔 잘 안 나와 있지. 한 번은 걸려서 디지게 혼났어. 소나무 밑에서 잔가지 낫으로 한참 치고 있는데 주인이 와서 막 난리를 치는 거야. 그래서 그냥 낫만 들고 비 맞고 집에 오던 기억이 나. 그때가 열네다섯 살쯤 됐을 거야.”

# 비닐우산의 등장

‘불과 2, 3년 전 만해도 소위 지우산이 태반이었다. 장판빛깔의 기름을 먹인 종이우산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비닐우산에 쫓기어 완전히 그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1963.5.26. 경향신문)

‘대나무살에 창호지를 바른 뒤 콩기름을 먹인 우산은 차라리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살이 26개로 촘촘히 만들어진 기름종이 우산은 살이 8개뿐인 지금의 비닐우산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질겨 웬만한 빗줄기에도 살이 꺾이지 않았다고 한다.’ (1993.8.30. 동아일보)

비올 때 도롱이를 썼다는 얘기도 있다. 도롱이는 짚을 엮어 우비처럼 걸치게 만든 것이다. 엄마의 이야기론, 비 오는 날 논에 물꼬를 트거나 물길을 내러 나갈 때 주로 남성들이 잠시 걸치는 용도로 사용했다. 이와 관련한 기사도 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학교에 갔다. 집에 삿갓과 도롱이가 있으나 학생이라는 체면상 그런 우비는 하지 않았다. 삿갓과 도롱이 차림을 했을 때에는 짚신에 삽을 들고 나서야 제격이다.’ (1962.8.2. 경향신문)

1960년대부터 비닐우산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이면 장사하는 곳마다 비닐우산이 동이 나 외상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나 비닐우산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중학교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나다 보니 우산을 쓰지 않고 흠뻑 젖은 채 교문으로 들어가는 학생이 의외로 많은 데 놀랐다. (…) 완벽의 비옷차림 학생도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6할이 비닐우산인데, 으레 그 곁엔 알몸 친구가 들어있기도 하고, 아주 물속에서 기어오른 듯 젖어가는 학생을 본다.’ (1962.4.2. 경향신문)

# 100미터도 못 가 뒤집힌 비닐우산

우산 이미지.(출처 아이클릭아트)
우산 이미지.(출처 아이클릭아트)

1970년대엔 비닐우산이 더 많이 생산되고, 이용됐다. 그러나 질이 나쁜 것이 문제였다. 한 번 팔렸다가 버려진 우산을 주워 와서 고쳐서 되파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출근하던 김용운 씨는 서울시청 앞 버스정류장에서 비가 갑자기 내려 1백 원에 사 쓴 비닐우산이 불과 5백 미터 떨어진 회사에 도착하기 전에 살이 어긋나는 등 못쓰게 됐다고 불평했다. (…) 서울에 나도는 우산은 거의가 재생품들로 재건대원들이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못쓰게 된 비닐우산을 한 개 13원씩(많이 부서진 것은 2~3개에 13원)에 수집, 고쳐서 다시 시중에 내다파는 것.’ (1974.5.25. 경향신문)

답답한 시민들은 불만을 터트렸다. 어떤 이는 100원을 주고 산 우산이 100미터도 못 가 뒤집어지자 서울시장에게 규제를 요청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요즘 비닐우산은 한 번 이상 사용하기 힘들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뒤집어지지 않아 그대로 집에 놔두면 대가 썩기도 합니다. 또 어떤 우산은 비닐테두리가 넓기도 하고 어떤 것은 꼬마들조차 혼자 쓰기가 힘들 만큼 작은 것도 있습니다. 우산의 규격이나 품질을 일정하게 하고 가격을 규제할 길은 없는지요?’ (1974.6.5. 경향신문)

# 믿었던 철제 우산마저

사실 비닐우산만 판매하는 건 아니었다. 1950년대 중반 협립제작소는 우산 살대에 천까지 씌운 철제우산을 완제품으로 내놓았다. 1960년대에는 2단식 접는 우산과 1단 자동우산이 생산되기도 했다.(1995.7.23. 한겨레) 그래서 쉽게 망가지는 비닐우산보다는 오래 쓸 수 있는 철제우산을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금속우산은 6백 원에서부터 1천여 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아무리 질이 좋지 못한 것이라도 한여름 철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비닐우산을 10여 차례 사서 쓸 경비면 웬만한 금속우산을 살 수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1971.5.15. 경향신문)

그러나 믿었던 철제우산의 품질도 불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경기도 양주에 사는 박승원 씨가 겪은 황당한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하찮은 비닐우산을 사느니보다는 좀 더 오래 쓸 수 있으리라는 계산 밑에 산 것이 가두에서 팔고 있는 5백 원 호가의 포지우산이었고 덕분에 비를 피하면서 그날 일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노란 바탕 티샤쓰의 잔등이 부분은 어느새 거뭇거뭇하게 물들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따져 볼 것도 없이 이는 질 나쁜 염색을 쓴 우산이었기에 빗물이 흘러 샤쓰에 떨어진 것이다.’ (1972.7.26. 경향신문)

1980년대 들어서도 우산의 품질은 만족스러운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시판 우산은 발수도, 물견뢰도, 염수분무, 도금두께 등 검사기준에 대부분 미달되어 완전한 우량제품의 비율은 8%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비를 맞았을 때 빗방울이 떨어져 나가는 발수도는 80% 이상이어야 하는데 방수처리가 안 돼 70% 이하인 것이 수두룩하고 천의 염색이 쉽게 변하며 니켈, 크롬 등의 도금 상태가 부실하고 얇아 소금물을 살대에 안개처럼 뿌려본 결과 16시간 안에 부식되는 것이 반수 이상이었다. 또 우산을 접거나 펼 때 뻑뻑하고 스프링이 약해 작동이 안 되는 게 많았고 천과 살을 2가닥 실로 2~3번 꿰매야 하는데 엉성한 박음질의 상품이 태반이었다. 우산꼭지 부분이 너무 길고 뾰족해 안전사고 위험도 많았다.’ (1983.7.22. 경향신문)

이에 정부에서는 우산을 사전 검사 대상 품목으로 지정해 합격품에 한해 ‘검’자 마크를 붙여 시판하게 했다. 우산이 정부기관의 관리 대상이 되자, 품질과 디자인은 급속도로 좋아졌다.

# 산성비에 머리가 빠진다고?

1990년대 들어 반드시 우산을 써야 할 사정이 생겼다. 공기오염 때문에 하늘에서 산성비가 내리는데, 이 비를 맞으면 머리가 빠진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산성비 논쟁은 1980년대에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대머리’라는 자극적인 단어에 강하게 반응했다.

‘산성비의 문제는 (…) 숲은 말라 죽을 것이며 농사는 폐농의 위기를 당하고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져 남녀불문하고 대머리가 생길지도 모르고 전선이 부식되어 전철이 불통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1993.9.18. 동아일보)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다. 비의 산성도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질 위험은 없다는 게 정설이다.

# 내 꿈아, 너는 비에 젖지 말거라

우산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엄마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 집에 가다가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비 피하느라 서 있던 기억이 나. 그러면 늬 할머니가 우산 가지고 데리러 왔거든. 시골이라 길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오다가다 그렇게 만나는 거지. 일하러 다닐 땐 그냥 비 맞았는데 그땐 왜 비를 피했나 생각해보니까, 책 때문이었어.”

엄마의 허리춤에는 책보가 매달려 있었다.

“책 안 젖게 하느라 애를 쓴 거 같아. 사람은 다 젖어도, 세상없어도 책은 젖으면 안 되니까.”

언젠가 보았던 외국 배경의 사진 한 장이 생각났다. 비 오는 날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은 비를 맞은 채 우산으로 첼로를 씌워주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 아래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비에 젖더라도 내 꿈아, 너는 젖지 말거라.”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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