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회숙(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장) 문화관광해설사
10년 전부터 인천 답사하면서 인천의 변화상과 역사 연구

[인천투데이 이보렴 기자] 대부분 어린 시절 동네에서 오래 사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듣다 보면 어린 마음에도 저게 진짜일까 싶을 때가 있다. 동네 친구의 집이 예전에는 농원이었고, 지금은 낡아 사람들이 찾지 않는 건물이 100년 전에는 ‘핫플레이스’였다는 둥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마을의 역사다.

기록물을 찾아 살펴보고 현장 답사로 인천의 역사를 연구하는 장회숙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났다. 장 씨는 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다. 한 지역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그 지역에서 몇 년이고 사는데, 지금은 동구에 거주하면서 동구의 문학 답사를 주도하고 있다.

인천 중구에서 문화관광을 해설하는 장회숙 씨.(사진제공ㆍ장회숙)
인천 중구에서 문화관광을 해설하는 장회숙 씨.(사진제공ㆍ장회숙)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인천 연구

장 씨는 인천에 애정을 많이 갖고 있다. 인천 근대문학 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인천문학동아리를 꾸려 인천을 소재로 한 근대소설들을 읽고 소설 속에 묘사된 현장을 찾아간다.

“근대문학 답사를 본격적으로 한 것은, 한 신문사 기자가 와서 근대문학유산 현장을 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다.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부터 오정희ㆍ강경애ㆍ이태준 작가 등의 작품을 읽고 작품 속에 묘사된 인천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찾아온 기자는 현덕 작가의 ‘남생이’라는 소설에서 인천의 근대를 묘사한 장소에 의문을 갖고 현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근대문학 답사를 시작한 건 2010년이다. 그 때부터 인천 연구를 본격적으로 했다. 당시 사람들은 ‘산업유산’이라는 게 뭔지도 잘 몰랐다.

“2010년에 시작한 동네 답사는 인천시립박물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인천 탐방 프로그램을 2년간 진행한 게 다다. 인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인천의 산업유산과 관련한 논문을 준비하는 한 친구를 만나면서부터다. 한국은 2005년에 일본이 ‘군함도’를 개방하면서부터 산업유산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2010년에 인천의 산업유산에 대해 알려달라며 민운기 선생의 ‘스페이스빔’에 찾아왔다. 그 친구는 우리나라에서 근대산업유산 관련 1호 박사가 됐다.”

장 씨가 소개한 그 친구는 남지현 경인연구원 연구위원이다.

지난해 12월 말과 올해 1월 진행한 인천 근대문학 답사. 지도를 보고 현재의 길과 비교해 답사하고 있다.(사진제공ㆍ장회숙)
지난해 12월 말과 올해 1월 진행한 인천 근대문학 답사. 지도를 보고 현재의 길과 비교해 답사하고 있다.(사진제공ㆍ장회숙)

인천, 일제강점기 노동운동과 함께 성장

장 씨는 인천을 “노동운동과 함께 자란 도시”라고 했다. 개항과 동시에 일제에 필요한 산업이 유치됐고, 그 산업에 노동자들이 밀려들어 조성된 도시라고 설명했다.

“일제는 인천 개항 이후 자신들에게 필요한 사업 중심으로 도시를 조성했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주요 산업은 정미업ㆍ양조업ㆍ제염업이었다. 우리나라 근대산업의 발달과정을 한눈에 보여준다.”

인천은 대표적인 개항도시다. 1883년 개항과 동시에 새로운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장 씨는 당시 인천의 3대 산업 중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이 정미업이라고 설명했다.

정미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정미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쌀을 담아주는 두량꾼, 쌀가마니를 배로 옮기는 칠통꾼, 배로 가져간 쌀가마니를 쌓는 하륙꾼이 있었다. 1892년에는 두량꾼의 임금 보전 투쟁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임금을 강제로 깎으려던 일본 자본가들은 당시 “조선인 두량꾼들이 불량해 쌀을 담다가 흙을 섞어 담을 수 있다”며 타협을 택했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인천 중구에는 정미업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도시재생이나 재개발 사업 등으로 그 흔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철거 위기에 놓인 세관 창고 건물이 협의를 거쳐 이전ㆍ복원됐다. 민ㆍ관이 지혜를 모은 좋은 사례로 기억된다.
철거 위기에 놓인 세관 창고 건물이 협의를 거쳐 이전ㆍ복원됐다. 민ㆍ관이 지혜를 모은 좋은 사례로 기억된다.

점점 사라지는 일제의 수탈과 저항의 상징들

인천의 곳곳을 답사한 만큼, 장 씨는 인천의 근대산업유산들이 어떻게 멸실됐는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인천의 근대산업유산이 멸실되기 시작한 때는 2011년이라고 했다.

“처음에 인천세관이 사라졌다. 인천세관은 제대로 조사하기 전에 사라졌다. 조선우선주식회사의 창고였던 옛 국일관도 2013년에 철거됐다. 그때는 유동현 현 인천시립박물관장과 함께 답사를 했는데, 인천 정명 600주년이 되던 해이기도 하다. 당시 이곳을 백범기념관으로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지금의 내항 1부두에서 노역했는데, 당시 조선우선주식회사에 고용돼있었다. 이곳은 또한 1930년대 노동운동 현장이었다. 부두 하역노동자 대투쟁이 국내에서 가장 크게 일어났던 곳이며, 일본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중동우체국ㆍ아사히여관ㆍ오사카상선 등이 모두 모여 있던 곳이다. 그런 곳이 주목도 받지 못하고 사라졌다.”

조일양조장 본사 건물은 2012년 철거돼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일양조장 본사 건물은 2012년 철거돼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3대 산업인 정미업ㆍ양조업ㆍ제염업의 흔적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인천세관과 국일관 이후 문제가 됐던 곳은 조일양조장이다. 2010년과 2011년에 조일양조장을 답사했다. 조일양조장 옆엔 사택도 있었다. 그 앞이 개울가다.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으로 조일양조장 전무로 근무한 일본인이 자신이 살던 곳이라며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일양조장 사무동이 팔리고 난 후 헐렸다. 그 후 아사이양조장 사무동도 헐리면서 산업유산이라는 것이 조명받기 시작했다.”

조일양조장은 남한 최초의 근대적 소주 공장이다. 1919년 10월 12일, 일본인 기업가들에 의해 설립돼 소주와 청주, 과일주, 위스키, 주정 등을 생산했다. 1920년대 초에 소주 생산능력이 2만 석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다.

철거 직전 오쿠다정미소 건축물.
철거 직전 오쿠다정미소 건축물.
오쿠다정미소 건축물이 철거된 장소.(사진제공ㆍ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오쿠다정미소 건축물이 철거된 장소.(사진제공ㆍ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정미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곳은 오쿠다정미소다. 공장과 창고, 사장 집까지 다 남아있었는데 최근 모두 헐렸다. 오쿠다정미소가 협신정미소로 바뀌었는데, 쌀가마니가 무너져 노동자들이 죽기도 했다. 여공들은 쌀을 도정하고 남은 쌀겨를 연료로 사용하고, 보리를 도정하고 남은 보릿겨로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 이런 노동현장이 사라진 것이다.”

오쿠다정미소 건축물은 인천시가 근대건축자산으로 지정한 건축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개인 사업자가 매입해 지난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에 철거했다.

장씨는 인천 근대산업유산의 멸실 과정을 지켜보면서 보존도 중요하지만 활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다들 그 장소를 찾아가고 관심을 갖고 보존해야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장소를 어떻게 활용해야하는가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공간의 역사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사람들이 친숙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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