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 기록펜화 분야의 독보적 경지
고향 인천에서 미술 꿈 마무리하고파

[인천투데이 백종환 기자] 1mm 공간에 0.05mm의 선 다섯개를 그려 넣는 세밀화의 대가다.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무려 50만~70만 번의 손질을 거친다. 그의 펜화는 이미 예술을 넘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다. ‘캔버스 구도자’ 김영택 펜화가(75)를 만났다.

청라국제도시 자택에서 이뤄진 인터뷰 내내 그의 예술적 열정은 차고 넘쳤다. 반짝이는 눈빛에서 대가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누가 얼마 전까지 병마(대장암)와 싸운 사람이라고 여기겠는가. 김 화백은 먼저 사람의 ‘눈(目)’ 얘기부터 꺼냈다. “흑백을 구분하는 간상세포(1억개)와 컬러를 구분하는 원추세포(600만개)가 망막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흑백그림에서 보는 궤적이 훨씬 입체적인 이유지요.” 흑백그림만 고집하는 속내를 알 것 같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

김 화백은 해방되던 1945년 인천의 부평 백마장(산곡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터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 외에는 기억이 흐릿하다. 그러다 다섯 살 되던 해에 동구 송림동 샛골로 이사와 쭉 그곳에서 자랐다. 인근 산꼭대기에는 이국적 건물인 ‘닥터 알렌(Horace Newton Allen-선교사)’ 별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자주 뛰어놀았다. 지금의 숭의동 전도관 자리다. 이 건물은 그가 후일 건축물을 탐미하는 모티브가 됐다.

김 화백은 창영초등학교를 나와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인천중-제물포고를 나왔다. 초등학교부터 공부를 꽤 잘하는 총명한 학생이었다. 무엇이든 의문이 생기면 반드시 원리를 알아내야 직성이 풀렸다. 처음 카메라를 손에 쥔 중학생 시절 사진 찍히는 원리가 하도 궁금해 분해-조립을 수 없이 반복했다. 살던 집 구조가 맘에 들지 않아 혼자 설계도와 씨름 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게 ‘독학’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묘사에 탁월했다. 지폐를 원본과 거의 똑같이 그려 주위의 감탄을 자아냈다. “인천중 미술시간에 장선백 선생이 ‘웬만한 미대생보다 데생을 더 잘한다’고 늘 칭한해 주셨습니다. 우쭐했죠. 그때부터 이미 그림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홍익대 미대에 들어간 거고요.”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

김 화백은 대학을 나와 펜화를 그리기 전까지 광고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쳤다. 그 시절 일화다. 당시에는 생소한 MRI(자기공명영상장치) 카다로그 제작 주문이 들어왔다. 그냥 예쁜 그림 찍어 광고주가 원하는 카피를 넣어 주면 끝이었다. 그런데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 그냥 넘어가질 못했다. 원서를 뒤져가며 MRI 시스템을 탐독하고, 어느 정도 원리를 터득한 뒤 카다로그 작업에 들어갔다. 마음을 담은 결과물은 클라이언트도 깜짝 놀랄 만한 성과로 이어졌다.

김 화백 아호는 ‘늘샘’이다.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샘처럼 쏟아낸다는 뜻이다. 평소 생각하던 ‘인천사랑’ 아이디어는 이렇다. “동인천역에 내리면 항구도시 이미지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저 황량한 건물들 뿐이죠. 광장 공터에 대형선박 앵커(닻)만 떡 걸어놔도 분위기는 금방 달라지죠. 아! 인천은 항구도시구나...라고요.” “송도해안가에도 수명이 다 한 대형 선박을 띄워 횟집으로 꾸미거나, 크루즈선을 개조해 해상호텔을 오픈하는 것도 상상해 볼 수 있죠. 아마 대박 날걸요?”

김 화백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명 건축물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한켠에는 늘 인천의 것을 화폭에 담고 싶은 욕심이 떠나질 않았다. 자유공원에 있던 존스턴별장도 그중 하나다. “핑계 같지만 인천에는 우리의 근대건축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개항장에는 대부분 일본식 건물들이구요.” 그래서인지 인천을 소재로 한 작품은 강화 정수사, 진해루 등 손에 꼽을 정도다.

김 화백은 문화적 토양이 척박한 고향 인천에 펜화미술관을 세우는 게 꿈이다. 자신의 원본 펜화 100여점과 틈틈이 모아온 골동품, 도자기류, 카메라 등을 기증 할 생각도 갖고 있다. 여기에 세계 각지에 있는 펜화를 모아 미술관을 만들면 세계 최초이자 최고 수준의 펜화미술관이 될 거라고 자신한다. 그러나 많은 비용이 드는 재원마련이 고민이다. 외부의 도움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 화백은 몇 년 전 인천시가 유명화가의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자 여기저기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 걸 잘 알고 있다. “혹여 제 미술관을 인천에 건립한다고 하면 똑같은 얘기가 나올게 뻔합니다. 김영택이 그동안 인천에 뭘 한게 있냐고...” 그런 소리를 듣기 싫어 그동안 입밖에 뻥끗도 내지 않았다.

“인천쯤 되는 도시는 그럴 듯 한 미술관이 벌써 몇 개는 들어섰어야 합니다. 지방에는 조그만 도시에도 각종 미술관이 수두룩합니다. 부러울 따름이죠.”

작은 요소 여럿이 모여야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소규모 미술관부터 차곡히 쌓이면 그게 인천의 커다란 문화 자산이 된다는 것이다. 김영택 미술관을 꿈꾸는 것도 그런 관점으로 보면 된다.

김 화백 그림은 세계 유일의 기록펜화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소실된 문화재를 복원해 그리는 작업이 함께 이뤄진다. 얼마 전 불에 탄 파리의 노틀담 사원이나 파르테논신전 등이 앞으로 작업 대상이다. 서울 광화문~경복궁에 이르는 청계천 풍속도(높이 0.6mx길이 12m)도 곧 착수한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국보급 작품으로 구상중이다.

김 화백이 지금까지 그린 펜화는 모두 300여점이다. 20여 년간 그린 것 치고는 소작이다. 워낙 정밀한 작업이다보니 한 점당 서너달 걸리기 일쑤다. 그나마 최근에는 건강을 추스르느라 작업 활동이 조금 뜸했다.

“한국디자인이 세계를 제패 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직선보다 곡선에 끌리는 심리가 그 이유다. “인간은 누구든 자유곡선을 선호합니다.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이치지요. 근데 자연에 직선이 어디 있습니까. 곡선은 보는 사람을 편하게 하고, 내 그림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지요.”

김 화백은 요즘 부쩍 해남 미황사를 자주 찾는다. 몸이 허약해졌을 때 선뜻 손을 내밀어준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108배를 하고, 채식을 하고, 마음을 비우고, 그림을 그린다. 펜화분야 세계 최고봉으로 독보적 예술세계를 구축한 김 화백도 삶에 있어서는 결국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이웃임이 분명했다.

전남 해남 미황사의 겨울.(그림제공 김영택 화백)
전남 해남 미황사의 겨울.(그림제공 김영택 화백)
전남 순천 선암사 승선교.(그림제공 김영택 화백)
전남 순천 선암사 승선교.(그림제공 김영택 화백)
경남 양산 통도사 범종루.(그림제공 김영택 화백)
경남 양산 통도사 범종루.(그림제공 김영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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