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20 - 인천 강화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서 봄 들판의 아지랑이를 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서 있으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가을이 되면 가슴 한 구석으로 스산한 바람이 마구 파고 들어와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겨울에 내리는 흰 눈은 이제 약간은 번거롭다.

하기야 반대로 사계절이 있다는 게 오히려 생활의 불편함만 가져와 하나도 반갑지 않을 수도 있겠지. 사계절 때문에 겨울옷에 여름옷에 난방에 냉방까지 모두 갖추고 살아야하니까. 어쨌든 가을에 붉게 물든 단풍을 못보고 넘어가면 약간 아쉽기는 하다. 하마터면 올가을 단풍도 못보고 넘어갈 뻔했다.

10월 23일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에서 주최한 ‘제1회 길 떠나는 인천공부’ 행사로 강화에 다녀왔다. 단풍철이라 그런지 부평역에는 이른 아침부터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있다. 대부분 향우회, 동문회 행사. 우리나라에서 참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 지연과 학연.

1시간 쯤 걸려서 첫 번째 방문지인 갑곶돈대에 도착했다. 강화대교 지나서 바로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나온다.

그런데 옛날에 있던 강화역사박물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무슨 세계 해양전시회인지를 한다고 과도한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알고 보니 강화역사박물관은 1년 전에 고인돌공원으로 옮겨 다시 개관했다. 인천을 사랑하기로 했다면서 내 인천사랑은 아직 멀었다.

# 갑곶돈대와 비석군

▲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복원돼있다. 처음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했다가, 조선 현종 때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실록과 서적을 보관했다.
갑곶돈대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요새로 강화 53돈대 중 하나다. 돈대란 주로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시설이다. 갑곶돈대는 고려 때 강화로 천도했던 시절, 몽고와 싸울 때 염하를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조선시대 병인양요(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 때는 프랑스 극동함대 병력 600여명이 이곳으로 상륙하기도 했으나, 삼랑성(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해 도망갔다. 이때 강화성 내에 있던 강화 동종을 약탈하려했으나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 등을 약탈한 후 대부분의 건물에 불을 질렀다. 어쨌든 이 전투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돈대 입구 오른편으로 비석군이 있다. 강화유수, 부사들의 선정비다. 원래 선정비란 임기를 다 마친 관리들을 위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해 세우는 것이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대부분의 선정비라는 게 백성을 수탈하는 또 하나의 방편이었다. 선정비를 핑계로 아전들은 비용의 몇 배를 거둬들였다. 심지어는 고을 원에게 아부하기 위해 부임하기도 전에 선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비석군 중 딱 하나 평민들을 기린 비가 있다. 바로 강화진위대였던 정기운·김경선 등을 추모하는 비석이다. 진위대는 지방의 질서유지와 변방의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최초의 근대적 지방 군대인데,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된 후 일부 군인은 의병에 가담해 의병 활동의 발전과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독립군 이동휘 등이 강화진위대 지도자였다.

# 평화전망대

양사면 철산리 평화전망대로 갔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개성공단이 직선거리로 15km밖에 안 되고, 개풍군은 1.8km로 매우 가깝다. 그런데 전망대 이름인 ‘평화’와 세워 놓은 입간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칼끝 총끝을 겨누면서 어떻게 평화를 말할 수 있나? 봉우리 이름도 ‘평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시쳇말로 아주 ‘깬다’. ‘제적봉’이라고 해서 무슨 옛 지명인 줄 알았더니, ‘제압할 제’자에 ‘붉을 적’자를 써서, ‘빨갱이를 물리치라’는 뜻으로 김종필이 지은 이름이란다. 하루 빨리 이름을 제대로 바꿔야한다. 입장료도 생각보다 너무 비싸다.

평화전망대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던 민통선 북방지역에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2008년 9월 5일 개관했다. 양사면은 거주인구 2000명의 작은 마을인데 최근에 10개 리의 이장, 부녀회장, 노인회장 등 마을대표 40여명이 모여 ‘이야기가 있는 양사면 마을 지도’를 펴냈다. 이 지도에는 각 마을에서 전해오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관련된 문화유적이나 명소의 위치가 표시돼있는데,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 고인돌공원

▲ 강화 고인돌공원에 있는 고인돌.
고인돌공원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도시락이라 약간 번거로웠지만 모처럼 소풍 나온 기분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 평화전망대에서 산 북한산 들쭉술을 한 잔씩 나눠먹었다. 들쭉술을 마시니 2001년과 2006년 두 차례 평양을 방문했을 때 생각이 난다. 지금 분위기로는 무슨 아련한 꿈같다. 평양은커녕 금강산과 개성관광도 중단된 상태니.

점심을 먹고 나서 고인돌을 돌아봤다. 예전에 한 번 와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정비한 후에는 처음이다.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경기지방을 비롯해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탁자식으로, 뚜껑돌은 길이 710cm, 너비 550cm나 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이다. 안내하던 이상범 선생은, 고인돌 위로 40명도 넘게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면서, 올라가서 주위를 조망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아쉬웠다.

고인돌 옆으로 계단 같은 것을 만들어놓으면 어떨까 싶다. 사람들은 은연 중, 섬에 웬 고인돌일까, 정말 고대에 이 섬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살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육지 위주의 사고에 갇혀서 그렇다.

바다를 중심으로 사고한다면 그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배를 타면 북쪽으로 남쪽으로 심지어 중국까지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하다. 삼별초들이 제주로 내려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구려 연개소문도 강화 출신이라고 하지 않는가. 바다를 중심으로 사고한다면 사실 강화는 한반도의 중심이다.

# 강화역사박물관

신축한 강화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갑곶돈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신축했다. 우리나라도 건축물의 겉모습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다.

이제 콘텐츠를 채우는 게 문제다. 1층에 수자기와 동종이 전시돼있었다. 문화유산해설사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동종은 프랑스군이 약탈하려다 너무 무거워 갯벌에 버리고 간 것이다. 강화읍에 있던 것을 고려궁지로 이전했다가, 강화역사박물관 내부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삼일절과 광복절 등 국경일에 직접 타종했다는데, 종이라는 게 계속 쳐야 종 아닌가?

수자기는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에 빼앗긴 것인데, 깃발 중앙에 장수를 뜻하는 ‘帥(수)’자를 적었다 해서 수자기로 일컫는다. 이 군기는 장기 대여 형식으로 돌아왔다.

박물관 머리에 10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14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시회가 열린다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이틀 차이로 전시회를 못 보다니 안타깝다. 외규장각 의궤 21책과 외규장각 발굴 조사 당시 출토 유물 등 전시물 총35점을 선보인다는 이 전시는 외규장각 의궤 반환 기념 전국 순회전의 일환으로 약탈 전 도서가 보관됐던 강화의 역사성을 고려해 지역에서는 첫 번째로 열린다고 한다. 외규장각은 1782년 조선 정조가 왕실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립한 국가도서관이다.

# 전등사와 정족산성

▲ 전등사 대웅전은 네 귀퉁이에 나무로 깎아 만든 인물상으로 유명한데, 어떤 이들은 원숭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대웅전을 지은 목수와 살다가 도망친 여인을 저주하기 위해 목수가 조각해 놓은 여인이라고 한다.
전등사는 정말 오랜만이다. 전등사는 삼랑성이라고도 부르고 정족산성이라고도 부르는 성 안에 있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성의 길이는 2300m.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다. 대부분 무너진 것을 1998년 복원했다. 동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양헌수비가 서 있다.

양헌수비는 조선 고종 병인양요 당시 순무 천총이던 양헌수 장군이 정족산성에서 강계포수 500여명을 매복시켰다가 습격해 프랑스 군대를 격퇴시킨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10년에 건립한 것이다. 승전비는 양헌수와 초관 17명, 경초군 121명, 표하군 38명, 포수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대웅전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대웅전은 안 보이다가 갑자기 몸 전체를 보여준다. 어느 계단일까? 물론 사람마다 키가 다 다르니 계단도 다 다르겠지. 전등사 대웅전은 보물 제178호.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처음에는 진종사였는데, 고려 충렬왕비 정화공주가 이 절에 귀한 등을 시주했다 해서 전등사로 개명했다. 대웅전을 보려면 꼭 대조루를 지나야하는데, 이곳을 지나려면 누구나 고개를 숙여야한다.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돼 옮겨진 법화경 목판 104매가 보존돼있다. 대웅전은 네 귀퉁이에 나무로 깎아 만든 인물상으로 유명한데, 어떤 이들은 원숭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대웅전을 지은 목수와 살다가 돈만 갖고 도망친 여인을 저주하기 위해 목수가 조각해 놓은 여인이라고 한다. 대웅전 안에 들어가 보니 신미양요 때 싸우던 군사들이 써 놓은 낙서가 있었다. 모두 전사한 병사들이다.

대웅전 뒤 삼성각으로 갔다. 안내하던 이상범 선생은 대부분의 절은 대웅전보다 삼성각 자리가 더 전망이 좋단다. 정말 그런가?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 100m 오르니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복원돼있다.

처음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했다가, 조선 현종 때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실록과 서적을 보관했다. 정족산 사고를 구경하고 성곽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갔다. 북문을 지나 정상으로 올라가니 마니산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고, 산 아래 논은 누렇게 물들었다. 논은 모두 조선시대 때 간척한 곳이다. 물론 마니산도 따로 떨어진 섬이었다.

고려 고종 때 지은 궁궐로 현재는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는 정족산 가궐지를 지나 대웅전 앞마당으로 다시 내려왔다.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사물각은 다 아는 것처럼 불교의 사물 즉, 북, 운판, 목어, 종을 모셔 놓은 누각이다. 종은 인간을, 운판은 날짐승을, 목어는 물고기를, 북은 길짐승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벌써 날이 저문다. 강화 밖으로 빠져나갈 일이 걱정이다. 하기야 초지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점심 먹고 나면 차가 막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프로야구를 봤다. 다행히 SK가 이기고 있다. 기행도 다녀야 하고, 야구도 응원해야 하고, 인천사랑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 <글·사진> 신현수·사)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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