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덴 형제의 새 영화 <더 차일드>

종종 뉴스를 통해 “여고생이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어쩜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저리도 없을까’ ‘학교에서는 피임 교육도 안 시키나?’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청소년이 임신을 해서 낙태를 하든, 갓 태어난 아이를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리든, 양육을 책임질 든든한 부모가 있어 용감하게 출산을 결심하든, “요즘 애들 문제야” 하는 식의 노인네같은 말은 아니어도 “사회가 썩으니 애들이 저러지”라고 푸념을 늘어놓는 것이 내가 한 전부였다.

그래서 그랬는가 보다. 벨기에의 형제감독 장 피에르, 뤽 다르덴의 영화 <더 차일드(The Child)>를 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던 것은.
청소년들이 임신했을 때, 그리고 출산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지 단 한 번도 그네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내게, 영화 속에서 너무 일찍 부모가 돼버린 브뤼노와 소니아에 밀착해 흔들리는 카메라의 시선은 낯설고 신선한 끄덕임을 안겨주었다.

거리에서 방황하는 20살, 18살 커플 브뤼노와 소니아. 한번도 부모가 될 거라 생각하지도, 그래서 당연히 부모 될 준비도 못했을 이들에게 ‘갑자기’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들이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이나 부성애, 모성애를 당연히 느끼게 될 거란 생각은 얼마나 억지스러운가.
더구나 길거리 소매치기가 월수가 괜찮은 직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폼나는 일이라 생각하는 브뤼노가 갑자기 생긴 아이를 보고 아빠로서의 책임감을 갖는 것보다는 목돈에 팔아넘기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나는 브뤼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사지 멀쩡하면서 소매치기와 구걸로 입에 풀칠을 하고, 그러면서도 죄의식 하나 없고, 자신의 아이를 음성적인 입양브로커에게 팔기도 한, 범죄와 패륜이 일상인 아버지 브뤼노가 밉지 않은 건 왜일까?아무리 사소한 친절이라도 자신에게 고마운 일을 한 사람에게는 고맙다고 인사할 줄 알고, 아이를 팔았단 소리에 사랑하는 애인이 실신하자 곧바로 돈을 돌려주고 아이를 찾아오고, 소매치기 공범 어린 꼬마가 경찰에 잡혀가자 스스로 경찰서에 찾아가 자신이 구속되고, 그렇게 악하지 않은 브뤼노의 면면을 봐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다, 아니다.
아이를 팔아버린 브뤼노를 용서하지 못하는 애인 소니아의 냉대에 그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하고 터덜터덜 돌아나오는 그의 모습이, 아이를 되찾아오는 대신 두 배의 돈을 요구하는 브로커들에게 몰매를 맞고 가지고 있던 몇 푼 안 되는 돈마저 빼앗기는 그의 모습이, 아버지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함에 대한 비난을 묻어버릴 만큼의 안쓰러움과 연민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브뤼노는 자신의 아이를 돈 몇 푼에 팔아버린 패륜을 저질렀으나 그것이 잘못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저 사랑하는 소니아와 폼나는 커플룩을 입고 깔깔대며 사는 게 좋은 스무살 청년이었을 뿐이다. 어떤 냉대와 폭력에도 대응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무기력한 소년이었을 뿐이다.

이 영화의 홍보 전단을 보면 ‘아직도 우리는, 희망에 대해 생각한다’는 문구가 있다.
글쎄, 교도소에 면회를 온 소니아와 부둥켜 안고 흘리는 브뤼노의 눈물이 과연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의 눈물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출소해서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아직도 희망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브뤼노의 깨우침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수많은 브뤼노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 볼 줄 아는 ‘더 차일드’의 시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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