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혜광학교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

“조금 떨리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연주한다는 게 좋아요”

▲ 무대에 오르기 전 연습실에서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는 인천혜광학교 학생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대기실에서 만난 이주희(11ㆍ혜광학교 4학년)양의 볼이 빨갛게 상기돼있다. 잠시 후 주희양은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연주자로 무대에 오른다. 같은 반 친구인 전상빈(4학년)군도 함께 바이올린을 켠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이들 주위엔 악보가 없다.

9월 28일 오후 3시 30분, 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인천혜광학교 심포니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가 열렸다. 시각장애인들이 다니는 혜광학교(교장 명선목) 학생 70명과 선생님 25명, 음악 강사 20명이 함께 오케스트라를 꾸려 이날 창단 연주회를 연 것. 시각장애인이 중심이 된 오케스트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야말로 세계 최초다. 단원들이 악보뿐 아니라 지휘자도 볼 수 없어, 지휘자는 지휘를 하며 박자와 빠르기 등을 일일이 마이크로 설명했다. 단원들은 이를 이어폰으로 듣고 연주한다. 얼마나 힘든 과정이었을지 상상이 안 된다.

공연 시작 전에 만난 문윤주(십정동ㆍ전상빈군 어머니)씨는 “어젯밤 설레서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아이가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로 흥분되고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상빈군은 녹내장을 앓아 앞을 전혀 볼 수 없다.

문씨는 “상빈이가 바이올린을 3년 째 배우는데, 지난 두 달은 하루에 6~7시간씩 연습했다”며 “연습이 힘들 텐데도 재미있다고 한마디씩 할 때마다 기쁘고 안심이 된다. 나와 아이가 많이 밝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한태순(시흥ㆍ이주희양 어머니)씨도 “아이가 세살 때 암으로 시력을 잃은 후 마음이 안 좋았는데, 주희가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집안 분위기가 많이 밝아졌다. 아이 성격도 밝아지는 걸 보니 악기가 아이들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며 “이렇게 큰 무대에 선다고 생각하니 이 순간 내가 더 떨리고 설레는 것 같다”고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공연시간이 다가오자 객석 1300석이 가득 찼다. 무대 조명이 켜지고 검은 옷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맨 연주자들이 나와 자리를 잡았다. 어린 학생들과 제법 자세가 잡힌 학생들, 그리고 선생님들이 저마다 자신의 악기를 마주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이 순간을 위해 함께 땀을 흘렸을 터. 이어 지휘자가 들어서고 첫 곡으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연주했다. 웅장하고 활기찬 연주가 전문가 못지않다.

▲ 인천혜광학교 ‘씨엘중창단’이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선사하고 있다.
다음으로 연주자였던 아이들 몇 명이 선생님이 이끄는 대로 무대 앞으로 나왔다. 혜광학교 ‘씨엘중창단’이다. 맑은 목소리로 ‘숨바꼭질’과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g in the rain)’를 부르는 모습이 앙증맞아 웃음과 흥이 절로 나오는데, 마침 아이 두 명이 짝을 이뤄 신나게 춤을 췄다. 객석에서도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쳤다. 노래가 끝났는데 아이들이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제자리로 안내해 줄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아! 잠시 잊었다. 이 아이들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이어 피아노가 등장했다. 피아노 연주자로 나선 곽상윤씨는 시각장애 1급으로 혜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교직을 이수한 뒤 다시 학교로 돌아와 후배들을 제자로 가르치고 있다.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의 구분이 필요 없는 무대라 감동이 밀려오는데, 여기에 유키구라모토의 ‘루이스 호수’ 곡이 연주되니 훈훈한 공연장이 서정적인 분위기로 가득 찼다.

장애인으로 구성된 ‘해밀합창단’도 게스트로 무대에 올랐다. 합창단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푸른 열매’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도 연주자들은 흐트러짐 없이 합창단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합창이 끝나자 연주자들이 발을 굴러 호응했다.

이들이 퇴장한 후, 관악기 앙상블로 ‘도레미송’과 ‘사랑은’이 연주됐다. ‘사랑은’은 관악기의 묵직한 소리처럼 차분하게 연주되는 듯싶더니 이내 쿵짝 쿵짝 하며 신나고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런 신나는 사랑이라면 한번 해볼 만할 것 같다.

이어 트럼펫 협연과 오펜바흐의 ‘천국과 지옥 서곡’, ‘아리랑’ 연주를 지나, 무대에 섰던 모든 이들이 다시 무대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지휘를 맡은 이경구(인천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씨는 “우리는 가진 것이 많아 교만해질 수도 있고, 갖지 않은 사람을 비하할 수도 있다. 여기 있는 친구들은 이전에 바이올린을 만져본 적도, 연주한 적도 없다. 하나하나 음을 짚어 위치를 외우고 악보를 외웠다. 누군가 우리를 불우하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린 우리보다 더 갖지 못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되고 싶다. 이 정성에 누가 박수를 안 보내겠는가?”라며 관객을 향해 이야기했다.

이어 “연주자들에게 장애가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많이 연습했다. 나(지휘자)는 가장 좋은 곳에 보이지만, 가장 수고한 사람들은 바로 선생님들”이라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듣고 몇 마디를 기다려야 하는지, 지금 연주되는 건 어떤 악기인지를 비롯해, 악보 한마디 한마디를 일일이 다 가르쳤다. 선생님들에게 감사한다”고 전했다.

▲ 인천혜광학교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창단 연주회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
이경구 지휘자는 관객을 향해 돌아서서 지휘를 했고, 관객들은 모두 일어선 채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큰 소리로 불렀다. 오케스트라 단원 130명의 연주에 관객 1300명이 노래하는 대합창이 이뤄진 것. 노래가 끝나자 관객들은 엄청난 환호와 박수로 앙코르를 요청했고, 이에 오케스트라는 맨 처음 연주했던 ‘위풍당당 행진곡’을 한 번 더 연주했다.

공연이 끝나고 만난 관객들 중 몇 명은 소감을 길게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유주영(연수동)씨는 “많은 사람들의 헌신 속에 이렇게 오케스트라가 탄생한 것이 놀랍다. 아름답고 순수한 하모니였다”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런 하모니를 만든 것에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바이올린을 지도한 김하나(혜광학교 초등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의 장애를 넘어 바이올린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리허설을 할 때부터 뭉클했다. 아이들이 기특하고 대견스럽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비올라를 연주한 김선도(17)군은 “기분이 뭔가 남달라요. 악보 외우는 게 힘들었어요. 끝나니 후련하기도 하고 조금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라고 소감을 말했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어머니는 끝내 울음을 쏟았다. “정말 자랑스러워요. 이렇게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어요. 꿈을 갖고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아주 감동받았어요”

지휘자 이경구씨는 “(단원들에게) 모두 애쓰고 수고했다고 전하고 싶다. 대견스럽다. 다른 공연을 할 때도 물론 좋지만, 이번 공연은 연주 자체가 감동이었다. 여기에 동참한다는 게 감사하고 고귀하다”며 공연을 마친 소감을 전했다.

혜광학교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이날 창단 연주회를 시작으로 앞으로 국내외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공연에서 이경구 지휘자는 “이들은 앞으로 안마와 침술만이 아니라 음악을 직업으로 가질 수 있다” 말했다. 시각장애인들의 새로운 꿈과 날개가 세상에 펼쳐진 순간이다. 이들이 위풍당당 행진곡에 맞춰 씩씩하고 힘찬 행진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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