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석 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양주 백정 임꺽정은 조선 전기에 명성을 떨친, 도적들의 우두머리다. 황해도 봉산을 근거지로 해 활약하며 정사 기록에도 이름을 남긴 인물이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명종 14년인 1559년부터 토포사 남치근이 토벌에 성공하는 1562년 1월까지 임꺽정 무리와의 추격전이 짧게나마 기록돼있다.

이때는 허균의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홍길동 부대가 연산군 시절 충청, 경기 일대에 출몰하며 저항하다 붙잡힌 뒤 한 세대 가량이 조금 지났을 시점이었다.

연산군이 환관 김순손에 대한 앙갚음으로 부평지역 내의 인가를 모두 내쫓고 금표로 울타리를 쳐놓던 때였다. 금표 안에 갇힌 부평은 관원들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서 도적들이 수시로 넘나드는 황무지가 됐다는 전언이다. 또 임꺽정 부대는 경기, 강원 일대에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니 조선 전기의 부평지역은 백성들로 구성된 무장집단의 저항 근거지로 이용됐을 법한 곳이다.

실례로 부평지역에 전하는 민담들 중에는 도적떼와 관련된 이야기가 여럿 있는데 징맹이고개나 안하지고개는 도적들의 소굴로 자주 언급되고, 아기장수 설화나 계양산 장사굴 등 소년장사 이야기도 타 지역 못지 않게 전해온다. 다소 황당한 내용이긴 하지만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부평 앞바다에 배 1000척이 닿을 때 세상이 개벽한다는 오래된 예언도 무심히 넘길 이야기만은 아니다.

임꺽정은 단순히 추국 사건에 연루된 도적의 두령에만 머물지 않고 가공의 인물로 계속 재탄생하며 백성들의 희망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근자에 와서도 의적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를 굳게 지키게 됐는데 여기에는 벽초 홍명희의 역할이 아주 컸다.

벽초는 1928년 11월 21일부터 <조선일보>에 ‘임꺽정전’을 연재하기 시작하며 ‘가장 학대받는 백정계급’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홍명희가 일제에 의해 투옥되기도 하고 지면을 옮기는 등 우여곡절이 있기도 했지만, 1940년까지 연재가 계속된 ‘임꺽정전’은 풍부한 조선말로 백성들의 일상과 풍속을 발굴해 다시 역사로 엮어낸 대작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마당 한쪽에서 대궁밥을 얻어먹는 민초들의 생생한 모습을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벽초는 단순히 과거의 묘사에만 충실한 것이 아니라, 소설을 통해 1920년대 조선의 근대를, 근대 조선 속의 민족의 의미를 되새김하며 실험하는 기회로 삼았다. 우리 근대문학이 갖고 있는 훌륭한 자산이다. 여기서 내가 다시 ‘임꺽정전’에 대해 주목하는 이유는 그 안에 담겨 있는 부평의 흔적 때문이다.

홍명희는 소설을 집필하면서 예닐곱 군데 정도 부평을 무대로 삼았는데 전체 분량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갈등의 고비마다 중요한 배경이 되도록 했다. 예를 들어, 꺽정이 검술을 배우기 위해 계양산 자락에 있는 주막집 늙은이를 찾아가는 광경이라든가, 청석골 오두령의 출신을 계양산패의 졸개 개도치로 설명해둔다든가 하는 경우다.

이외에도 꺽정의 갖바치 스승 주팔이 허암 정희량에게서 도술을 배우는 광경도 소개되고 있다. 말년에 홀연히 자취를 감춘 정희량의 한때 은둔처는 서구 검암의 허암봉으로 알려져 있다.

벽초는 정사와 야사와 설화를 적절히 버무려 자신의 역사관에 맞는 새로운 인물과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거기에 부평지역도 중요한 한 꼭지를 차지한 셈이다. 집필을 위한 답사를 직접 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부평이라는 공간이 작품 구상을 하는 데 상상력의 동력 역할을 했으리라고 본다.

얼마 전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이 부평에서 시작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책 읽기가 운동이 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지역민들이 책을 매개로 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반갑다.

‘책 한 권이 한 사회를 변화시킬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 그치지 않고 부평을 상상의 자원으로 삼는 또 한 명의 벽초를 길러내서 또 다른 시각의 역사를 창작할 수 있는 기반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또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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