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석 인하대 사학과 강사
지난해 연말 타계한 한양대 리영희 교수는 광복 직후인 10대 후반에 낡은 자전거 한 대를 구입해 서울과 부평을 오가면서 성냥 장사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당시 부평에는 일본군 조병창 창고에서 흘러나온 화약을 재료로 해서 만든 성냥 도매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리 교수는 남대문시장에서 담배를 말아 팔다가 단속이 심해지자 이쪽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조병창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던 군수 공장이어서 일본이 패망하며 남겨둔 물자들이 상당량 비축돼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미군이 곧바로 이곳을 점령해 애스컴(ASCOM)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았기 때문에 한국 사람의 출입은 불가능했고 공장의 정확한 실태도 파악되지 못했다.

당시 부평공업협회를 책임지고 있던 김석기 회장은 여기에 주목했다. 그래서 인천공업협회연합회 회의석상에서 조병창 안에 엄청난 양의 공업 원료가 저장돼있음이 분명하고, 기계를 비롯한 적지 않은 물자들이 지하에 매몰돼있다는 증언이 있음을 밝혀 미군 당국에 이를 처분하도록 하는 진정 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심각한 원료 부족에 시달리던 인천 공업계로서는 눈앞에 두고도 손조차 대볼 수 없는 조병창 땅 밑이 노다지로 보였던 셈이다.

1946년에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대’가 미군의 통제 아래 지급받은 무기나 장비, 의복 등도 일본군 창고에 있던 재고품들이었고, 훨씬 이후의 일이지만 1980년대에는 조병창 터에 묻혀있다는 중국발 금괴를 찾기 위해 발굴 작업이 벌어졌을 만큼, 온갖 물자들의 집결지라는 인식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1945년 9월 조병창을 접수한 미군도 이곳을 군수 기지로 활용했다. 38도선 이남지역의 점령 임무를 맡은 미제24군단 중에서 인천지역을 맡았던 부대가 제24군수지원사령부(ASCOM 24)였는데 한국전쟁 중에 잠시 제3군수사령부(the 3rd Logistical Command)가 설치되기도 했으나 곧 기지가 재편되면서 ‘애스컴 시티(ASCOM City)’로 정착해갔다. 애스컴에는 병력대기소도 설치돼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건너온 병사들이 여기를 거쳐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물자가 몰리는 곳에 사람도 몰리기 마련이다. 일제강점기 하의 조병창과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애스컴 주변으로 찾아 들고 상점이나 클럽 등이 늘어났다. 미군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윤락여성’들 또한 상당수에 달해서 이들의 자립 교육을 위해 세워진 산곡3동의 협성여자기술양성원을 거쳐 간 원생들이 1968년 이후 10여년간 1200여명에 달할 정도였다.

특히 미군기지 내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근로자들의 수도 적지 않아서 1970년대 초 애스컴이 폐쇄될 무렵 실직한 사람들이 2400여명에 이르고, 왜관 등지로 옮겨간 종업원들도 수백 명이어서 실제 근무하던 근로자들은 이 숫자를 훨씬 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미군기지는 캠프마켓으로 축소되면서 한적한 공간으로 변했다. 이제는 부평 거리에서 미군과 마주치는 일도 흔하지 않다. 한창때와 비교한다면 격세지감을 느낄만하다.

어찌 보면 애스컴을 거쳐 간 사람들은 부평지역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본국으로 돌아간 미군들조차 애스컴과 함께 부평이라는 지명을 기억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서로의 추억과 경험을 공유하기도 한다. 때로는 직접 찾아와 부대 주변의 마을과 거리들을 되짚어 회상하는 이들도 있다. 젊은 시절의 한때를 부평에서 보냈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만한 일이다.

오히려 이런 점에 있어서는 한국인 근로자들을 찾기가 더 힘들어 보인다. 이미 환갑을 훌쩍 넘겼을 나이를 고려하더라도 미군기지 종사자들이나 그 울타리 주변에서 한 시절을 보냈을 그 많던 사람들은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일부러 숨어버렸다기보다 아마도 그럴 기회나 공간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군이나 한국인 근로자들이나 모두 광복과 한국전쟁, 그리고 그 후 도시의 변화 과정을 부평지역과 함께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그 경험들이 모아진다면 지역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부평이 이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할 때다. 모임을 지원하든 네트워크로 엮어내든 아니면 기타의 방법을 이용해서 경험을 공유할 통로를 부평이 주도해 열어줄 때가 됐다.

최근 들어 미군의 고엽제 살포와 매몰 관련 증언이 퇴역 주한미군들로부터 연이어 폭로되고 있다. 너무 오래 걸려서 왔다. 할 얘기들이 얼마나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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