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주 대학원생.
지난주 ‘평화학’이라는 다소 낯선 학문분야의 연구자 한 분을 만났다. ‘평화’라고 했을 때 곧바로 떠올리게 되는 온정, 배려, 돌봄, 사랑과 같은 따뜻한 이야기들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 연구자와의 대화는 배제, 구조적 폭력, 권력관계, 위협, 공포 등 살벌한 단어들로 채워졌다.

“평화란 가치중립적인 단어일 수 없다. 내가 평화를 추구하는 행위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나와 다른 누군가의 권력관계, 위계질서에 의해 평화와 폭력이 나뉘는 것뿐이다”

그의 말을 들으며, 혹시라도 내가 부지불식간에 구조적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곰곰이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또 평화를 지킨다는 의미의 ‘안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안보란 생사존망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특정한 누군가가 독점함으로써 다수가 특정한 세력에게 알아서 복종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와의 만남이 있은 지 이틀 후, 부평미군기지 2번 게이트 앞에 차려진 ‘환경오염 조사를 촉구하는’ 농성장에 갔다. 초여름답지 않은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후덥지근한 농성장에서 한나절을 보내며, 나는 다시 ‘평화’와 ‘안보’에 대해 생각했다. 그와 나눈 대화들을 떠올렸다.

미국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 곳곳에 기지를 설치하고 미군을 파견했다고 했다. 주한미군은 이 나라의 안보를 보장하는 파수꾼이라고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이 지키려는 평화는 과연 어떤 평화인가?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그들이 이 나라 곳곳에 기지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해 철통같이 지키는 평화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폭력이지는 않은가?

안보라는 미명하에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던 땅에 기지를 짓고, 안보라는 미명하에 모든 정보를 독점하며, 그래서 기지 주변을 조사해서 발암물질이 나왔는데도, 고엽제를 기지 안에 보관했다는 증언이 있는데도, 시민들의 투쟁으로 이미 반환 결정이 난 부지임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평화와 안보를 이야기함에 있어 미국과 이 나라는 결코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다. 남과 북의 대치상황을 만든 주체도 미국이고, 남과 북의 전쟁을 잠시 쉬는 휴전협정에 조인한 주체도 미국이다. 이 나라는 평화와 안보에 있어 단 한 번도 주체인 적이 없었다.

대놓고 ‘미국 프렌들리’를 외치는 이 나라 고위층도 주체인 적이 없거늘, 하물며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권력도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에게 ‘그들의’ 평화와 안보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도리어 생사존망을 결정하는 고급(!) 정보를 독점하고 있다는 빌미로,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우리 스스로 공포에 무릎 꿇게 하는 만능 요술봉을 휘두르는 것을 두고 평화라고, 안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사는 것은 아닌가?

몇몇 여성들과 기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앉아 수다를 떨었다. 어떻게 하면 부평미군기지를 평화와 생태와 생명의 땅으로 바꿀 수 있을까? 무기를 화분으로 바꾸고, 전쟁과 군대라는 무시무시한 상징의 공간인 기지 앞에서 재미있는 전래놀이를 하며 난장판을 만들고, 함께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우리의 상상은 끝이 없었다. 우리가 수다를 떠는 동안 기지 담벼락 아래에서는 그 동네 주민으로 뵈는 나이 지긋한 여성이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오빠가 지켜줄게’라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불평등한 권력구조를 은폐해온 것이 바로 그들의 평화였고 안보였다. 결국 그들의 평화와 안보가 가져온 것은 우리가 마시고 있는 물에 발암물질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공포였고.

진정한 평화를 말하고 싶다면, 우리의 평화를 지키고 싶다면, 기지 앞 여성들의 수다처럼, 기지 담벼락 아래서 텃밭을 가꾸는 여성처럼, “오빠, 됐거든!” 하고 코웃음칠 수 있는 용기가, 두둑한 배짱을 만들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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