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부평지킴이] 56년간 한곳에서 영업하는 한국식 커피전문점

영아다방 앞에서

퇴근길 다방 입구에 쪼그려 앉아
너를 기다리는데 비틀거리는 그림자 하나
비에 젖은 청천동 네거리를 휙 지나간다

누구는 부평역에서 도장 파는 걸 보았다 하고
주안에서 찌라시 돌리는 걸 보았다 하고 또 누구는
국수를 잘 말던 노모와 함께 인절미를 파는 걸 보았다 하는데
교통사고로 고장난 기억을 이끌고 절뚝거리며
아는 얼굴마다 찾아다니던 네 흉터투성이 얼굴
다방 건너편 포장마차 불빛 새로
바로 어제인 듯 말갛게 비쳐온다

국졸 노조위원장 빵잽이 출신
감방에서 배운 기술 들고 찾아다니던 그해 초겨울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 없는 공장문 끝없는
공단 담벼락 끼고 걸으면 굴욕처럼 배가 고파왔다던,
네 눈물 사이로 흉터는 도드라지고
흉터를 분칠할 학력도 재능도 없었던
네게 쏟아지던 겨울비 바로 오늘인 듯
딱지 아물지 않은 붉은 상처 게워내며
오늘도 비는 내리고 너는 끝내 오지 않고
건너편 산곡동 성당에는
빛바랜 플래카드 몇 만장처럼 날리고 있다.

김해수 시인이 노동 현장을 보고 한 수 지은 시 ‘영아다방 앞에서’이다.

▲ 영아다방 외부 모습. 
‘영아다방’이 시의 제목으로도 사용되기도 하고, 인천에서 택시나 버스를 타고 물어보면 ‘영아다방을 모르는 운전기사는 간첩’이란 우스갯소리도 듣게 되는 곳. 지도가 아무리 바뀌어도 공식지명도 없는 영아다방 이름을 따서 부르는 ‘영아다방사거리’는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선거철이면 각 정당의 거물급 인사들이 영아다방사거리를 유세장소로 선택해 방송이나 인터넷을 달구면서, 전국적인 뉴스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런 영아다방이 얼마나 유명세를 탔으면 대중교통 버스 행선지에도 정류장 명칭으로 사용했을까, 궁금하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대학에선 프로젝트 과제로 학생들에게 영아다방을 조사하게 했다는 소문까지 들린다.

세계적인 유명 커피전문점이 들어서는 마당에 한국식 커피전문점의 원조인 다방이란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채 56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영아다방을 찾아가봤다.

작은 2층 건물 한쪽을 막고 영업하고 있는 영아다방의 주소는 ‘인천시 부평구 청천동 세월천로 46’이다. 영아다방은 원래 같은 건물에 있는 ‘장 내과’ 자리에 있었는데 남의 건물을 세내서 있다 보니 임대료도 부담되고 해서 뒤로 물러났다고, 주인은 말했다.

▲ 옛날방식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실내 모습.
옛날방식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사연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니 몇 번째 주인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15년째 운영하는 여 주인은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지 않고 머리 허연 남편이 대신 나와 지키고 있다. 테이블 10여 개와 휴대전화기에 밀려 사라지는 동전 공중전화기가 눈에 띈다.

“연세가 있으신데, 다방은 잘 됩니까?” 하고 물으니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하고 몸이 아프면 접으려고 합니다”라며 말끝을 흐린다. 이어 주인은 “소일거리로 하긴 하지만 아시다시피 다방이란 게 점점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그렇다고 요즘 커피숍과 같이 인테리어를 바꾸거나 하는 건 생각지 않고 그저 옛날식 다방 모습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인다. 말하는 표정에서 왠지 모를 아쉬움이 묻어나는 듯하다.

주인의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장사가 안 되다 보니 6~7년 전부터는 레지(=여종업원)들도 없애고 혼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 취향에 맞춰 인테리어를 바꾸면 나이 든 사람들이 주 고객인데 그들과 젊은 사람들 사이에 불편이 따를 수도 있어 옛날 방식을 고수합니다. 손님 중엔 이런 모습의 다방이 왠지 포근하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커피 값도 고급 커피전문점의 반값도 안 됩니다”

찾아오는 손님 중엔 청천대우푸르지오아파트 자리에 있던 옛 동양철관 노동자들도 있고, 소문을 듣고 영아다방이 무엇 때문에 유명한지 궁금해 찾아온 젊은이들도 많다.

영아다방이 문을 연 지 얼마나 됐냐고 물으니, “글쎄요. 지금까지 주인이 여럿 바뀌어서 잘 모르지만, 자주 오시는 토박이 주민에 의하면 40년은 넘었다는데, 확실한 건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한다.

▲ 버스정류장 명칭도 영아다방이다.
주인이 ‘인신매매’범으로 몰리기도 

사람들에게 영아다방은 다방보다는 길을 찾는 이정표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지금 주인이 4년 전에 겪은 일이다. 문을 열고 얼마 있으니 갑자기 사복 차림을 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화장실이며 옥상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영문도 모르고 당하기만 했던 주인은 무슨 이유로 남의 영업장소를 영장도 없이 뒤지느냐며 따졌다. 그러자 형사들은 여자아이 어디 있느냐며 다짜고짜 주인을 죄인 취급하며 다그쳤다. 여긴 여종업원이 없다고 하자 경찰은 “분명히 여기 있다고 전화를 받았다. 내놔라. 어디 있느냐”고 하며 마치 주인을 ‘인신매매’범으로 몰았다.

그리고 잠시 후 형사들은 자신들이 찾고 있는 여자아이의 부모를 대면시켰다. 그 부모 이야기로는 천안에서 학교에 다니던 딸(고등학생)이 실종됐는데, 어제 전화 통화에서 “엄마! 부평 영아다방에 있어”라며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부모는 며칠 후 청천동에서 딸을 찾았다.

주인은 “이렇게 지명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가끔이지만 찾아오는 손님 중엔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긴 꼭 있어야한다고 당부까지 하지만, 장사가 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장사를 그만두더라도 다른 사람이 인수하면 영아다방이란 상호를 쓸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하며 웃는다. 

▲ 영아다방이 56년 됐다고 증언한 이상학씨.
56년 됐다고 증언한 주민을 만나다

취재하던 중 만난 산곡4동 주민 이상학(79)씨로부터 영아다방의 내력을 듣게 됐다. 그는 스물 셋이던 1956년에 군에 입대해 당시 미군기지였던 원적사거리 근처 산곡2동 현 한양 저층 아파트 자리인 55병참기지에서 카투사로 근무했다.

그는 “그때 이곳에 영아다방이 있었는데, 당시에 듣기로는 군대 가기 1년 전에 이곳 논과 밭이 있던 벌판에 2층 건물이 한 체 있었고, 영아다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영업한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허가증이나 그런 건 없고 영아다방이라는 간판에 여종업원들도 꽤 있었던 걸로 알고 있고, 장사도 괜찮게 된 걸로 안다”고 덧붙였다.

부평구보건소에 알아보니, 휴게음식점 관리 담당공무원은 영아다방이 최초로 정식 등록된 것은 1974년이라고 했다. 그는 “그 이전에 영업한 부분은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상황이 허가가 없어도 다방을 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부평구 청천동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하고 있는 영아다방, 역사의 증인처럼 그 모습 그대로 있기를, 영아다방을 기억하는 이들은 바라고 있다.

▲ 커피잔과 설탕ㆍ프림 통이 참 고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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