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유통업체 규제 장치 없어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무분별한 입점 등을 규제해 중소상인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개정된 유통산업발전법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이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였다. 바로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한-EU FTA) 때문이다.

한-EU FTA 양허안을 보면, 중소상인들의 생계와 밀접한 도매ㆍ소매ㆍ프랜차이즈 부문에서 쌀ㆍ홍삼ㆍ담배 등 몇 가지 품목만 제한을 두었을 뿐, 나머지 품목을 취급하는 유통회사가 국내시장에 진출할 시 아무런 제한조치가 없다고 한다.

게다가 한-EU FTA 7조 2항은 국회법도 상대국의 제소 대상에 포함하고 있어, EU 소속 국가의 유통회사들이 자국 정부를 통해 한국의 유통법과 상생법을 제소하는 게 가능하다.

이럴 경우 유통법과 상생법의 대형마트와 SSM 관련 규제 조항들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고,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현재는 전통상업보존구역 500미터 안에 SSM 등이 입점하는 것을 규제할 수 있으나, 양허안 대로 한-EU FTA가 체결되면 규제 시 외국자본이 자국 정부를 통해 우리나라를 상대로 제소할 수 있다. 아울러 그에 상응해 자동차 등 우리나라 주요 수출품에 대한 보복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에 반해 EU와 유럽의회는 한-EU FTA 협정이 체결되기 전 유럽연합의 각국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했다. EU 각 나라마다 ‘경제수요심사제도’라는 걸 둬 각 정부와 의회가 한-EU FTA 협정 발효 후 자국의 시장에 영향에 미칠 것 같다면 입점과 영업시간을 규제토록 한 것이다. 이번 양허안을 보면, 프랑스와 벨기에 등 EU 7개국은 한국 업체가 백화점ㆍ택시ㆍ미용실 등을 개설할 시 규제할 수 있게 돼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전혀 그런 장치가 없다.

결국, 이러한 독소조항을 담고 있는 한-EU FTA가 국회에서 비준된다면 지난해 11월 개정된 유통법ㆍ상생법은 무력화돼 유통재벌들의 무분별한 출점에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된다. 인천과 서울을 비롯한 곳곳에서 SSM 기습개점과 편법개장이 기승을 부릴 정도로 개정안은 한계가 있지만, 이는 중소상인들의 오랜 투쟁의 성과이며 최소한의 바람막이라 할 수 있다.

이마저도 사라진다면, 수많은 중소상인들은 몰락할 것이고 결국 현 정부에 등을 돌릴 것이다. 한-EU FTA가 600만 중소자영업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정부가 이제라도 예상피해를 조사하고 검증을 철저히 해 대책을 세운 뒤 비준 동의를 구해야함이 옳다.

한-미 FTA와 한-EU FTA의 번역 오류, 독소조항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정부와 관리들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커지고 있다. 협상은 이익보다 손해가 크지 않아야한다. 특히 국가 대 국가의 협상은 자국민의 보호를 최우선에 두는 게 이치다.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양허안을 다시 꼼꼼히 살펴 대책을 강구한 뒤 재협상에 나서야한다. 국회 비준은 그 다음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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