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석 인하대 사학과 강사
세상을 살다보면 코미디 같은 일들을 자주 만난다. 그런데 차마 웃지 못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희극은 비극이 된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1949년 교동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해 가을 무렵, 뭍에서 정체모를 사내 다섯이 섬으로 들어왔다.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장모(張某)라는 사람을 필두로 한 다섯 남자들은 섬에 머물더니 주민들을 무턱대고 납치해 정미소 곳간에 가둬버렸다. 붙잡혀 온 사람만 40명이 넘었다.

스스로를 방첩대원이라고 밝힌 이들은 납치한 사람들을 한 명씩 고문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좌익 혐의를 조사한다는 거였다. 게다가 거액의 금품을 강제로 징수하기까지 했다.

인정을 두지 않는 고문에 버틸 장사들이 있을 리 없었다. 10여 명이 불구의 몸이 되고, 결국 두 명이 죽었다. 그중 한 명은 현직 면장의 아우였다. 게다가 범인들은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논바닥을 파고 암매장해 버렸다. 피해자 가족들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당국에 고발했고, 인천지구 헌병대가 조사에 착수해 다행히 열흘 만에 시신을 발견했다.

쉬쉬하며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이 사건은 강화군 화도면장 출신의 제헌국회 의원 윤재근이 국회에 보고해 진상 조사를 요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국회는 윤재근의 보고를 받고 철저한 조사를 결의했다. 그러자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 장도영이 발끈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장도영은 범인들이 ‘전연 군인이 아님은 물론 정보국의 문관 또는 군속, 기타 정식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은 순전한 민간 악덕도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윤재근 의원에 대해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민국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럽고 의아하다’고 공격했다. 윤재근은 납치 피해자들이 좌익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라고 옹호한 바 있다.

장도영과 윤재근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방첩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외지 사람들이 좌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민들을 납치해 서로에게 전혀 관계되지 않은 좌익 문제를 놓고 때리고 고문하며 사망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말이다. 이건 비극적인 코미디다.

방첩대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 좌익 세력을 소탕하는 데 선봉에 섰던 정보기관이다. 모델은 남한에 주둔한 미 제24군단 예하의 정보기관 중 하나였던 ‘CIC’였다. 위 사건의 범인들이 정말 방첩대원인지 아니었는지는 지금에 와서 확인할 길이 없다. 잡혀간 교동 주민들이 좌익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었는지도 확인할 수는 없다. 광복 후 교동 주민의 80% 이상이 사회주의 세력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옛날 얘기다. 사상이 곧 살생부가 됐던 시절의 이야기다. 열세 살 소년이 총을 들고 마을을 지키고 주변 사람의 손가락질 한 번에 바닷가로 끌려가던 때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똑같이 반복되는 경우는 없다. 그래도 비슷하게는 간다. 그러니 위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안도감도 있지만 비슷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감도 똑같이 생긴다.

위 사건은 서로 다른 사상이 만나 건강한 어울림을 이뤄내지 못했을 때 결말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그때 대부분의 희생자는 자신들이 왜 희생당하는지도 모르는 순진한 주민들일 수밖에 없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좌익이니 좌파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들이 전투적 공격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섬뜩하다. 이념의 차이는 인정해야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제거할 목적으로 활용된다는 데 있다. 이제는 비슷한 집단들 속에서조차 막무가내로 던져지는 말들이 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은 우리 사회가 사상의 자유로움에 반하는 그러한 태도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비슷하게는 반복된다. 우리는 지금 희극을 공연하고 있을까, 비극을 공연하고 있을까.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