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암 스님 정암 명상치유센터
영산회상(靈山會相)은 전통 국악으로 줄(絲)풍류와 대(竹)풍류, 두 가지가 있다. 조선 세조 때의 ‘대악후보(大樂後譜)’와 성종 때의 ‘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는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相佛菩薩)’이라는 가사가 붙은 불교음악의 성악곡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정조 때의 ‘유예지(遊藝志)’에서는 가사가 없는 기악곡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던 영산법회(靈山法會)의 불보살(佛菩薩)을 찬탄하며 노래한 음악이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보면 영산(靈山)에서 범왕(梵王)이 부처님에게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부처님께서 그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으나, 오직 제자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게 정법안장(正法眼藏: 비밀의 법. 부처님의 진리를 볼 수 있는 지혜와 깨달음을 이르는 말)이 있어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을 문자로 세울 수 없어 교외(敎外)에 별도로 마하 가섭에게 전한다”고 했다. 이것은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불교 마음수행의 근거와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사례의 탄생 장면이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중국에서 태어난 무문선사(無門禪師)가 이를 보고 평하기를 “황면구담(黃面瞿曇: 누런 얼굴의 부처)이 방약무인해 마치 아무 사람도 없는 것처럼 양민을 갖다 억지로 노예로 삼고, 양의 대가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팔고 있는 격이다.

그 참 기특하긴 하지만 그때 대중이 모두 웃었더라면 정법안장을 어떻게 전했을까? 만약 가섭이 웃지 않았더라면 정법안장을 누구에게 전했을까? 그리고 정법안장이 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황면노자가 사람들을 속였다고 할 것이고, 만약 전수할 것이 없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홀로 가섭에게만 허락하였는가?”라고 묻고 있다.

윗글은 선종(禪宗)의 교과서인 무문관(無門關)에 나오는 말이다. 무문관은 선어록(禪語錄) 중에서 공안(公案) 48칙(則)을 뽑아 해설(解說)한 책이며, 송(宋)나라의 무문 혜개 스님이 설법(說法)한 것을 1228년에 그의 제자(弟子) 종소(宗紹) 스님이 엮은 것이다. 책의 원명은 선종 무문관이라 한다.

그런데 글의 내용이 안티(anti) 부처 그리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큰스님이 엇박자를 내고 있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무문 스님은 어째서 이리 불경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광범위한 사례연구를 보면, 결혼에 대한 만족도는 성격ㆍ지능ㆍ학력ㆍ수입ㆍ외모 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정서적으로 친밀하고 대화가 잘 통할 수 있는 부부의 결혼 만족도가 제일 높았다고 한다.

설문조사기관에서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배우자와 애인에게 바라는 희망사항을 조사했더니, 희망사항 1위는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각자 자신의 의견을 존중받는 것에 대한 개념은 달랐다고 한다.

사회적 인간관계에서는 대화와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대화란 두 사람이 상호간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써 주고받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미네소타 대학의 랄프 니콜스와 레너드 스티븐스의 실험에 따르면, 사람은 상대의 말을 아무리 주의 깊게 듣는다 해도, 말을 들은 직후 전체 내용의 절반 정도만을 기억하고, 2개월 정도가 지나면 들은 내용의 25%만을 기억한다고 한다. 이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의사소통 방법이 모두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선택적인 지각과 인식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화나 의사소통 또한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의도치 않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우리교육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며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교육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의사소통의 방법이 미숙해 강압적이고 지시적인 경향이 많은 것 또한 우리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다. 그런데 부처님에게 실컷 심술을 부린 무문 스님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끝을 맺었다.

“꽃을 들어 올렸을 때, 진리의 정체 환히 드러났다. 가섭은 그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지만, 인간이나 천인(天人)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네”

이것은 부처의 진심(眞心)을 알아들었다는 소리인가? 부처와 말이 통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에게 어떤 사유(思惟)의 방법을 알려주려 하는 것일까?

어떠한 대화든 말이 통해야 불행하지 않다. 당신과 주변인들의 행복을 위해 말하는 방법을 익혀보는 것은 어떨까. 통(通)하는 대화를 생활화하면 많이 좋을 것 같다. 부부ㆍ가족ㆍ직원ㆍ학생 등 구성원 간에 서로 통하는 대화는 정말 중요하고 아름다운 감정의 교류로 많은 이익을 주는 좋은 결과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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