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석 인하대 사학과 강사
이른바 ‘대동아전쟁’이라는 구호 아래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켜가던 시기, 조선반도는 전장의 확대와 더불어 급격한 공업화와 도시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새로 재편성된 도시는 심각한 주택난에 직면해야했다.

1930∼40년대 조선총독부가 기획해 전국 주요 도시에 차례로 적용해 간 ‘시가지계획’ 구역 내에서 주택 부족분은 9만여 호에 달했는데, 그 중 상당수는 대공장 등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의 사택 건설을 예상한 수치였다.
노동자와 기타 서민들에게 어떻게 주택을 공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당시 조선총독부의 고민이었고, 결국 1941년 7월 ‘조선주택영단’이라는 특수 법인을 만들어 총독부의 주택 건설과 운영 사업을 대행하도록 했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 본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보다 2개월 앞선 1941년 5월, 일본 내에서 이미 ‘주택영단법’이 공포되며 ‘주택영단’이 설립되기도 했다. 주택영단은 일본 정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택경영재단이라는 말의 약어라고 하는데 광복 후 조선주택영단은 대한주택영단으로 명칭의 변화를 겪었고, 다시 대한주택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로 계승돼갔으니 당시 조선주택영단의 사업은 지금과 빗대어 볼 때, 이들 공사들에 의해 수행돼온 주택 건설과 개량 사업과 맥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조선 병참기지화와 ‘고도 국방국가의 완성’이라는 목표와 병행해 조선주택영단은 설립 이후 자체 제작한 설계 도면에 따라 전국에 걸쳐 ‘영단 주택’을 건설해갔다.

그리고 그 중 한 곳이 현재 개발이 예정된 산곡동 87번지 일대 주택군이다. 좁은 골목길을 중심으로 주변 고층 아파트와 묘한 대조를 보이며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산곡동 일대 주택군은 인근의 청천동 ‘검정 사택’으로부터 시작해 산곡동을 거쳐 신촌, ‘삼릉’으로 이어지는 근대 신도시벨트 지역 중에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도시의 탄생과 변화, 소멸의 과정을 오롯이 담고 있는 보기 드문 근대의 도시 유적이다.

이곳 대부분의 주택들이 지붕과 벽을 일체형으로 만든 조선인 노동자 거주용의 공동단지형 외관을 띠고 있지만 구역에 따라 일본인이 주거할 목적으로 조성한 듯한 단독형 주택들도 일부 원형이 보존된 채 남아있기도 하다.

도심의 구조뿐만 아니라 건축물 자체에도, 나아가 당시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엿보기 위한 재료로서도 가치를 갖고 있는 셈이다.

또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집을 비우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가긴 했어도 한국전쟁 직후 정착한 주민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평이라는 도시가 겪어온 경험과 주민들의 삶이 거울처럼 비춰지는 공간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터이다.

이렇듯 강한 역사성을 갖고 있는 이곳 일대가 조만간 ‘정비’돼 사라질 예정에 있다. 도시가 계속해서 생장하고 진화해야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지만, 수많은 세월의 주름을 골목 곳곳에 새겨온 역사 공간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린다는 사실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더구나 풍물축제라는 전통을 내세운 행사가 대표 축제로 자리 잡고 있고 구의 이름을 내걸고 역사박물관까지 지어 놓은 지역에서, 사라져 가는 과거를 넋 놓고 바라만 보고 있다면 영원히 부끄러운 일로 남을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 등을 통해 영상 자료를 기록해 놓는 작업이 필요하다. 건축물을 보존하기는 어렵더라도 실측 자료만이라도 남겨두어야 한다. 아직 떠나지 않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인내심을 갖고 채록해 체계적인 인터뷰 자료로 보존해두어야 할 것이다. 좀 더 욕심을 내본다면 일부 건물은 그대로 보존해 문화 공간으로 재활용하는 방안도 고민해 봄직하다.

광기의 시대, 대동아전쟁의 찬바람이 산곡동 골목길 구석구석을 휩쓸고 지나갔다. 골목을 떠돌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한숨을 그 바람에 실어 영원히 떠나보낼 것인가. 우리는 지금 무거운 역사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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