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⑧ - 북촌에서 1박2일(상편)

한 달에 한 번 떠나는 여행인데도 개인 일정과 여행프로그램 일정, 신문사의 원고마감 기일을 모두 맞추는 게 만만치 않다.

민주올레를 진행했던 시민단체인 ‘시민주권’에서 주최하는 ‘임진강 평화여행’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개인 일정이 안 맞았고, 평화와참여로가는 인천연대 서지부에서 주최하는 ‘매향리 평화기행’은 원고마감일을 맞출 수 없었다.

우연히 ‘공감만세’라는 곳에서 주최하는 ‘북촌기행’ 프로그램을 발견하고 이 기행에 참가했다. 진작부터 북촌은 한번 마음먹고 꼼꼼히 뜯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맞춤한 프로그램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북촌에서 1박2일까지 할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뜻밖에도 1박2일이었다.

▲ 북쪽 한옥마을 골목길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풍경. 북촌 한옥마을은 삭막한 서울 속에서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지난 10월 16일부터 17일까지 ‘공감만세’에서 주최한 북촌 공정여행을 다녀왔다. 계동길에 있는 북촌문화센터에서 일행을 만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북촌 공정여행을 시작했다.

먼저 서울게스트 하우스로 갔다. 집 앞의 작은 마당을 배꼽마당이라고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음은 노란벽 작업실을 지나 청원공방으로 갔다. 청원공방은 소목장 심용식 선생의 집 겸 교육장이다. 우리가 찾아간 날도 수강생들이 창호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신문을 보니 아리랑 티비(TV)에 심용식 선생에 관한 다큐프로그램이 방영될 예정이라고 나왔다. 소목장은 가구ㆍ문구ㆍ창호 등을 만드는 장인이고, 대목장은 대들보 등 큰 재목을 마름질하고 다듬는 장인이다.

옛 정주영 가옥으로 가니 정주영 가옥 바로 옆의 한옥이 바로 티비 프로그램 ‘1박2일’팀이 묵은 곳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북촌에는 지도를 들고 바삐 다니는 사람이 무지 많았다. 옛 정주영 가옥은 원래 화신백화점 박흥식의 집이었다. 한보그룹 정태수도 이 집에 잠깐 살았다. 그러고 보니 썩 좋은 집터는 아니다.

‘가회로’로 나왔다. 북촌의 이른바 메인 로드이다. 북촌에 그렇게 넓은 길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헌법재판소와 감사원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마 가로수가 소나무라서 다행이다.

원래 북촌은 청계천 또는 종로의 북쪽

▲ 서울게스트 하우스. 집 앞의 작은 마당을 배꼽마당이라고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원래 북촌은 청계천 또는 종로(종로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길이다. 종로길을 피해 다니기 위해 종로길을 따라 좁게 만든 길이 피맛길이다)의 북쪽을 뜻하지만, 현재는 주로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 도로인 율곡로의 북쪽을 말한다. 율곡로 북쪽 중에서도 주로 삼청동길(=사간동길)에서 창덕궁길(=원서동길)까지를 북촌으로 부르고 있다.

율곡로에서 북촌으로 이어진 길은 대충 6개 정도가 되는데, 맨 왼쪽이 동십자각에서 삼청공원 쪽으로 올라가는 삼청동길, 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시작하는 감고당길,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별궁길,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가회로(재동길), 안국역 3번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면 현대빌딩이 나오는데 거기서 시작하는 계동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덕궁 담장을 따라 난 창덕궁길(=원서동길)이 있다.

편의상 북촌을 직사각형으로 생각한다면, 가운데 열십자의 모양으로 길이 나있는데 세로로 난 길이 가회로이고, 가로로 난 길이 북촌길이다. 삼청동길이 가장 번화하고, 가회로가 이른바 메인 로드이며, 계동길이 북촌의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이므로 당연히 길지 중의 길지다. 그러니 주로 세도가들이 모여 살았고, 그래서 아무 아무개 집터가 많은 거다. 반대로 남촌, 즉 현재 남산 근처는 가난한 선비나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다. 딸깍발이니, 남산골샌님이니 하는 말들이 그래서 나왔다. 책만 읽느라 찢어지게 가난했던 허생전의 주인공인 허생의 집도 남산골이었다.

일제는 북촌의 힘을 빼기 위해 남산 근처를 집중 개발했고, 그게 현재 명동과 충무로 등이다. 북촌에 살던 세도가들이 힘을 잃으면서 그 집안의 유물들이나 세간(=살림에 쓰는 온갖 물건)들이 밖으로 흘러나왔고, 그것들이 거래되던 곳이 풍문여고 길 건너 인사동이다. 하기야 율곡로는 일제강점기 때 창덕궁과 종묘의 맥을 끊기 위해 만든 길이니까 그때는 길 건너도 아니다.

아름다운가게 … 공정무역 ‘그루’ 매장

▲ 북촌의 메인 로드격인 가회로. 가로수가 소나무다.
‘정든찌개’에서 점심을 먹었다. ‘정든찌개’는 아름다운재단 희망가게 1호점이다.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는다. 이 재단은 태평양 창업자 서성환 회장이 출연한 총50억원 규모의 재단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의 전형이다.

북촌 공정여행 참가자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길 안내를 해주는 분은 ‘북촌 탐닉’이라는 책을 쓴 영화칼럼니스트 옥선희 선생이다. 북촌에서 10년을 살았다. 부럽다.

‘아름다운 커피’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곳이다. 자기 잔을 가져오면 300원 할인해준다. 이번 기행의 콘셉트가 공정여행이기 때문에 들르는 곳이 대부분 ‘공정함’과 관련이 있는 대안공간들이다.

‘공감만세’ 고두환 대표한테서 공정무역 커피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커피 한 잔에 들어가는 커피콩은 약 백알, 그중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단 한 알에 불과하다. 공정무역 커피는 생산자에게 정당한 몫을 지불하려고 노력하는 ‘착한’ 커피다. 바로 옆에 있는 아름다운가게 1호점인 안국점은 재활용품과 기부물품을 받아 판매하는데 2002년에 문을 열었다.

▲ 권위주의 정권시절 민주화 운동의 근거지였던 윤보선가를 감시하기 위해 높게 지어 놓은 현재의 명문당 건물이 눈길을 끈다.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재동 백송을 보러 갔다. 수령 800년이 넘은 천연기념물이다. 멀리서 보면 두 그루로 보이지만 실은 한 그루다. 헌법재판소는 박규수ㆍ민영익ㆍ홍영식ㆍ이상재ㆍ최린 등의 집터였고, 헌법재판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창덕여자고등학교 자리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곳이 아마 이곳 헌법재판소일 것이다. 국민들의 가치 판단까지 여기서 심판한다. 옳지 않다. 북촌 초입에 들어선 위압적인 건물도 북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별당길을 지나서 공정무역품을 파는 ‘그루’로 갔다. 가게의 외관이 독특하다. 국내 최초 공정무역 패션 브랜드인 ‘그루’ 제품을 파는 오프라인 매장이다. 물건을 살 때 좋은 브랜드 대신 만든 이들의 형편과 사정을 생각해보자는 게 공정무역이다. 우리의 공정한 소비로 라오스ㆍ네팔ㆍ인도의 생명들을 살리자는 게 공정무역이다.

정독도서관과 서울교육사료관

선학원 중앙선원과 안동교회를 지나 윤보선 가옥을 봤다. 개방하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권위주의 정권시절 민주화 운동의 근거지였던 윤보선 가옥을 감시하기 위해 높게 지어 놓은 현재의 명문당 건물이 눈길을 끈다.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독재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

조선어학회 터와 담갤러리를 지나 북촌길로 나왔다. 서미갤러리가 눈에 띈다. 서미갤러리? 아, 리히텐슈타인의 그림 ‘행복한 눈물’로 유명해진 갤러리군. ‘행복한 눈물’은 모그룹에서 비자금으로 구입했다는 의혹을 받은 그림이다. 만화 같은 그림이 100억원이 넘는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

정독도서관으로 올라갔다. 경기고등학교 터인데 76년 학교가 강남으로 이사한 후 서울교육사료관과 도서관으로 쓰고 있다. 터가 넓어 여기저기 의자가 많다. 그 의자에서 연인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토요일 오후의 한가함을 즐기고 있다.

겸재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릴 때 이곳에서 바라보고 그렸다는 것을 기념하는 비도 있고, 조선왕조 종친들의 족보와 어진(=임금의 화상이나 사진)들을 모아놓은 종친부 건물도 있다. 이곳은 또한 성삼문과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터이기도 하다.

▲ 서울교육사료관 박물관에 있는 옛 교실 모습.
교육사료박물관은 까까머리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도시락을 데우던 교실 안의 난로, 도시락 냄새 때문에 수업에는 마음이 없었던 4교시. 모든 지나간 것들은 이상하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진학할 중학교를 정하기 위해 돌렸던 은행 알이 들었던 통도 있다. 도서관은 등록문화재인데 이름에 값할 정도로 매우 고풍스럽다. 경기고등학교 터라 시험에 잘 붙는다는 소문이 나서 그런지 열람실에 들어가기 위한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도서관 담벼락을 따라 설치해놓은 조형물을 보면서 화개길로 올라갔다. 그냥 뒀으면 한갓 위압적인 담이었을 텐데, 그 담 위에 시를 붙이고, 노란 점을 찍고, 꽃을 그리니 담이 확 살아나고 친근감이 느껴진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북촌지도도 있었다. 화개1길은 북촌의 몽마르트로 불리는 곳이다.

인왕산과 북악산과 청와대 춘추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삼청동길을 꽉 메운 자동차가 장난감처럼 꼬물거린다. 삼청동길에서 화개1길로 올라오는 길은 모두 가파른 계단이다. 궁중에서만 사용하던 우물터인 복정과 코리아 단식원, 북촌생활사박물관 등이 이곳에 있다.(다음호에 하편 계속)

▲ 화개1길은 북촌의 몽마르트로 불린다. 인왕산과 북악산과 청와대 춘추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삼청동길을 꽉 메운 자동차가 장난감처럼 꼬물거린다.


▲ 글ㆍ사진 / 신현수(시인ㆍ부평고교 교사)
* 이 글을 쓰기 위해 참고한 책 : <북촌탐닉> 옥선희, 푸르메 /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이현군, 청어람미디어

* 필자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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