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석 인하대학교 사학과 강사
부평4동 신트리공원에는 백마상이 있다. 부평구의 상징 동물인 백마를 형상화한 동상이다. 구청에서 발간한 간행물을 보면 ‘건강한 부평구민과 힘차게 발전하는 부평구의 기상’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백마상이 가장 신비하게 빛나는 순간이 있다. 그 모습을 보려면 우선 보름달이 뜨는 맑은 가을 날 밤을 기다려야 한다. 달이 얼추 떠올랐다고 생각될 때 공원을 찾아가 보자. 입구를 막아선 하얀 말들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군마의 위용에 벌써부터 감동할 필요는 없다. 군마 가운데에는 앞다리를 치켜들고 뛰어 오르려는 튀는 말 한 마리가 있다. 그 말의 뒤편으로 돌아가 살짝 비켜서서 가만히 고개를 들고 잠시 기다리자. 보름달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말의 머리 위에 다다르고, 잠시 후 창백한 달빛이 갈기에 쏟아지면, 백마는 비로소 생명을 얻고 울부짖기 시작한다.

하지만 말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하지는 말자. 이 말들은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이다. 구의 상징물은 그것을 채택하게 된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하고 모델이 된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백마상은 그럴만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구의 상징물? 그럴만한 근거가 없다

우리가 백마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연상하는 것은 아마도 백마장(白馬場)이라는 지명일 게다. 백마장이 일제 강점기 당시의 지명인 백마정(白馬町)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온 바다. 그래서 백마가 붙은 지명을 없애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작년에는 백마공원이 원적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다.

백마정은 조선시대 부평도호부에 속해 있던 15개 면 중의 하나인 마장면(馬場面)과 관계가 있다. 마장면은 조선 중기 이후 대개 세 개의 마을에 90호 정도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에는 마정리(馬井里), 항동(項洞), 장말리(場末里) 등의 마을 이름도 보이는데, 일제 강점기 때는 산곡리, 효성리, 청천리의 3개 리가 속해 있었다. 이중 일제 말이 되어 산곡리가 일본식 이름인 백마정으로 바뀌면서 백마라는 단어가 처음 부평지역에 등장한다. 그리고 광복 후 백마장이라는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

간혹, 백마정이 고유 지명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일본식 지명으로 보기 어렵다거나 백마장과 백마상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거나 말하기도 하지만, 착각이다. 우리가 사용하던 지명은 마정리나 마장면이었고, 백마정은 여기에 있던 마(馬)라는 글자에 백(白)이라는 접두어를 붙여 만들어낸 조합어일 뿐이다. 그러니 백마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말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지명을 변형시키기 위해 조작한 말장난일 뿐이다.

백마상은 이제 끌어내릴 때가 됐다.

또, 백마상이 정말 백마장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어졌다고 해보자. 그러면 문제가 없을까. 이것은 상징물이다. 잘 묘사된 말의 신체구조를 공부하라고 만든 동상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느껴보라고 만든 구의 상징물이다.

나는 달빛 아래에서 뛰쳐나갈 듯 포효하는 백마를 보며 ‘건강한 부평구민’보다는 옥쇄를 다짐하며 달려가는 천황의 군대가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백마라는 단어가 부평지역에 등장하는 과정을 알고 있다면 당연한 일 아닐까. 굳이 이러한 생각을 갖게 만드는 상징물을 부평구 한복판에 세워둘 필요는 없다.

부평4동 우리은행 앞 보도는 언제부턴가 어슬렁거리는 비둘기들이 점거해왔다. 바닥에 있는 배설물뿐만 아니라 갑자기 날아오르는 새들 때문에 지나다니기도 힘든 곳이 됐다.

비둘기는 부평구가 상징물로 정한 새다. 올해 초, 환경부의 집비둘기에 관한 관리대책이 발표되면서 비둘기를 다른 상징물로 변경하는 방안을 마련한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반백년 동안 평화의 상징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비둘기도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서 물러나는 판이다. 우리가 굳이 백마의 고삐를 틀어쥐고 있을 필요가 없다. 신트리공원의 백마상은 이제 끌어내릴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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