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부평 정명 700년 역사 톺아보기 - 6. 부평현대사<3>-80년대의 부평과 민주화운동

<편집자 주> 1310년, 고려 충선왕 때 길주목이 부평부로 바뀌면서 부평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 이후 700년의 역사 속에 부평이라는 지명이 계속 사용돼왔다. 이에 부평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까지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역사 속 부평의 생활상과 현대사로 바라본 부평의 산업화 과정, 시민사회의 성장과정 등을 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과 공동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백화점ㆍ슈퍼마켓ㆍ상권의 형성

연재순서
1. 정명 700주년, ‘부평’을 말하다
2. 역사속의 부평 - 조선시대와 개항이후 변화의 모습
3. 부평지역의 항일운동사 - 의병항쟁과 3ㆍ1독립운동
4. 부평현대사<1> - 해방 전후의 부평
5. 부평현대사<2> - 산업화시기의 부평
6. 부평현대사<3> - 80년대의 부평과 민주화운동
7. 부평현대사<4> - 90년대의 부평과 시민사회의 성장
1970년대 경제발전을 거쳐 소득이 증가하면서 부평지역에도 현대식 상점형태인 백화점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평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백화점은 1978년 6월 22일 부평동 192-7번지에 개점한 부평백화점으로 80개 점포를 두고 있었다.

또한 대량 판매와 구매로 가격을 인하해 판매하는 대형슈퍼마켓은 소비자의 각광을 받아 급속히 늘어났는데, 이러한 증가추세는 1980년대 진행된 아파트 건설호황과 무관하지 않다. 대형아파트 단지가 세워지면서 단지별로 상가건물이 들어섰고, 슈퍼마켓을 비롯한 야채ㆍ수산물 ㆍ상점ㆍ정육점ㆍ양곡점 등이 위치하며 자체적으로 소규모의 상권을 형성해갔다.

이렇듯 1980년대는 재래시장으로부터 백화점과 대형슈퍼마켓, 아파트밀집 지역으로 상권축이 이동해가는 초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부평지역에는 점차 다양한 지역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돼가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상권으로는 부평시장 주변 상권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부평시장역으로부터 시장로터리, 부흥로터리까지 이어지는 이 지역은 주로 부평4동에 해당되며, 현재는 문화의 거리와 함께 현대적 상가와 재래시장이 함께 병존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권이다.

노동자의 도시 부평, 노동운동이 싹트다

상권이 활발해지고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1980년대에 노동운동이 싹트기 시작한다. 특히 부평지역에는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한 공업생산력이 집중적으로 입지했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도 노동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됐다.

또한 학생이나 지식인 등 노동운동의식을 지닌 세력들이 인천지역의 공업단지 가운데 서울에 가까워 접근이 쉬운 부평지역에 집중적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위장취업 등을 통해 공장에 들어가서 소모임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정치경제적 의식을 일깨우거나 지역단위의 연대조직을 꾸리고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등 1980년대 이후 부평지역의 민주노동운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역사적 조건으로는 인천지역이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던 때부터 노동운동의 전통이 축적돼있었고, 대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에 인천지역에서 전개되는 노동운동은 매스컴을 통해 빠르게 전국적으로 파급돼 나갔으며 이것은 다시 지역 노동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대우자동차,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다

▲ 홍영표·송경평 등 모두 8명이 구속된 대우자동차 파업사건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한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7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주류는 여성이었고, 주로 섬유산업 등 경공업 분야에서 전개됐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의 주역은 남성이었고, 사업장 또한 대규모 중공업분야였다. 이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개될 향후 노동운동의 미래상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1980년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은 예비군훈련문제와 상여금문제에서 시작됐다. 오전 예비군교육을 끝내고 귀가하는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오후 근무를 요구하자 부당함을 항의했고, 또 회사가 상여금을 20일 앞당겨 조기에 지급함에 따라 지급률이 감소되자 반노동조합적인 노조집행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일부 조합원들에 의해 ‘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가 발족됐고, 이들의 기관지격인 ‘대우자동차노동조합 정상화의 소식’(이후 ‘근로자의 함성’으로 바뀜)을 발간한다. 이는 조합원들과 노조 집행부간의 갈등 속에서 민주노조의 필요성과 투쟁을 통한 연대의식을 깨달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해주는 것이다.

1985년 4월 11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친 임금교섭이 사측의 거부와 당시 노조 집행부의 불이행으로 무산되자 조합원들은 16일부터 25일까지 파업투쟁을 진행한다. 결국 기본급 인상 등의 성과를 올리지만 8명의 노동자가 구속됐고, 1명이 해고되고 1명이 자진 퇴직하고 4명이 3개월 정직되는 등 파업을 주도했던 조합원들이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대우자동차의 파업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군부권력의 탄압이 강화되는 데도 불구하고 권력과 재벌기업에 정면으로 맞서서 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이고, 둘째 홍영표ㆍ송경평 등 지식인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부상하고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당시 노동운동의 흐름을 바꾸는 데 큰 파급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1986년 2월, 인천지역노동자연맹 탄생

대우자동차 파업 투쟁을 통해 단결의 힘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새로운 민주노조운동의 씨앗을 만들어갔다.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노투),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연합(구민연), 서울노동자연대투쟁연합, 안양지역노동3권쟁취투쟁위원회(안양3권위), 인천지역노동3권쟁취투쟁위원회(인삼쟁) 등 각종 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이 투쟁위원회들 중 청계피복노조와 구민연ㆍ노투ㆍ서울노동자연대투쟁연합이 1985년 8월 25일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했고, 1986년 2월 7일에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인천지부가 ‘인삼쟁’과 함께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을 결성했다.

인노련은 대중투쟁을 지도, 지원하며 선진노동자들의 정치의식화를 목적으로 했던 인천지역 최초의 정치조직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운동이념에 따라 사상투쟁이 가열되면서 결국은 정치이념에 따라 다수파인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과 소수파인 ‘인천지역노동자투쟁동맹’으로 분리된다.

5.3 인천항쟁,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다

▲ 1986년 5월 3일 주안시민회관 앞, 12시가 조금 지났을 때 시민회관 건너편 주안1동 성당에서 나온 인사연과 민통련(민주통일민주연합)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와 이미 시민회관 앞 사거리에서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투쟁한 인노련과 학생 시위대는 시민회관 앞 사거리를 점거한 채 신민당의 행사와는 별도로 집회를 개최하며 직선제와 노동3권 보장, 민중생존권 보장을 요구했다.
1980년대 진보진영은 한국자본주의의 ‘사회성격’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동시에 객관적 모순을 주체적으로 극복할 사회운동노선에 대한 논쟁이 폭발했다. 1986년에 들어 노동자 투쟁으로 고양되기 시작한 정치투쟁은 5월 3일 ‘인천항쟁’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당시 군부권력은 5.3 인천항쟁을 좌경용공세력들에 의한 체제 전복 기도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면서 수세국면을 전환하기에 몰두했는데, 형법 제115조 소요죄를 적용해 129명을 구속하고 60여명을 지명 수배했다.

하지만 5.3 인천항쟁은 민중운동세력이 제도야당으로부터 분리되고 독립적인 실체로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인천항쟁은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6월 시민항쟁 사이에서 전개된 가장 대규모의 반정부민주화투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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