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석 인하대학교 사학과 강사
‘놀토’를 맞은 초등학생들과 함께 인근 유적지로 가끔 답사를 떠날 때가 있다. 학습의 연장이라고는 해도 야외에 나온 아이들의 표정은 항상 밝고 약간은 들떠 있기 마련이다.

역사 유적 앞에 직접 서서 눈과 손으로 어루만지며 경험하는 촉감에 호기심은 끝이 날 줄을 모르고, 성벽 위나 풀밭을 쉬지 않고 뜀박질을 해댈 때는 군더더기 없이 어린아이의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 그러한 아이들의 발랄함을 막아서는 장벽은 공교롭게도 같이 동행한 부모들일 경우가 많다. 솔직히 말해 답사과정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답답함을 넘어 인상을 찌푸리게 할 때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씁쓸한 기분을 가시지 않게 만드는 것은 매 순간 고개를 들고 나타나는 필기에 대한 강박관념이다. 무엇이든지 공책에 적고 외우는 것을 볼 때에야 만족감을 느끼는 부모들의 교육열은 그래서 묘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가령 이런 경우다. 차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는 큰길가를 걸을 때 아이들은 자유롭다. 식사를 하기 위해 들른 식당이나 휴게소에서도 아이들은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로 인해 간혹 가슴을 쓸어내릴 만한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옆 테이블과 신경전이 폭발 직전에 다다르기도 한다. 심하게 말하면 생과 사를 넘나드는 기로에서,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의식해야 하는 자리에서 부모들의 눈길은 아이를 향하지 않는 셈이다.

하지만, 유적지의 안내판이 있는 곳에 다다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이의 어깨를 붙잡고 꼼꼼히 문화재 안내문을 적게 하거나 손에 든 자료집에 밑줄을 긋고, 이동 중인 버스 안에서는 그것을 암기했는지를 반복해 확인한다.

물론 적절한 메모 습관과 생각할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 나쁠 수야 없겠지만, 문제는 그러한 과정들이 경직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 ‘놀토’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이들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강요당하며 야외에서의 하루를 이어가는 것이다.

지난주 보도된 <부평신문> 4월 20일자, 초등학교에서 ‘강제 보충수업’ 실시 행태는 이러한 어른들의 경직된 교육의식이 얼마나 위험한 단계에 이르렀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안될 말이다.

초등학교에서조차 ‘강제 보충수업’과 같은 단어가 오르내린다면 교육은 이미 한참을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위 보도는 얼핏 1980년대 말 부평에 불어 닥친 교육운동의 과거를 떠올리게 해준다.

당시 전국 곳곳에서는 교육민주화와 참교육운동이 말 그대로 들불처럼 번져가기 시작했고 부평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8년과 1989년을 거치는 동안 동소정사거리에 있던 대경여상을 비롯해 몇몇 학교들의 학내 분규로까지 발전해 갔다.

교육민주화를 위한 교사ㆍ학생ㆍ학부모들의 바람은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관심을 끌었던 구호 중의 하나가 ‘강제적’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의 폐지였다. 이것은 물론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전인교육의 세례를 받고 싶어 하던 학생들의 작은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나마 입시와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는 초등학생들이 학력 향상이라는 이유로 방과후 생활까지 강제로 저당 잡힌다면 이 아이들이 바라보고 살아가게 될 사회가 어떠할지 쉽게 상상이 가는 일이다.

1988년 출판된 한 무크지에 실린 ‘누구를 위한 보충수업’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어느 여학생은 보충수업 폐지를 요구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끝맺고 있다.

‘가난한 것에 떳떳할 수 있는, 자기의 삶에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대통령에서 노동자ㆍ농어민까지, 심지어 술집접대부까지 서로가 나요, 너요, 우리라는 평등의식을 가질 수 있는 사회는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할 것이다’

20여년 전 한 여고생의 소망을 우리는 아직도 채워줄 수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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