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범상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연구교수/사회정책학 전공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상이한 가치, 이익, 문화 등을 가진 이 관계들은 항상 갈등과 타협, 순응과 저항, 전쟁과 평화에 노출돼왔다. 정치는 이러한 갈등적인 관계 속에서 피어나고 이를 해소하는 일에 관계한다. 즉 그 사회에 존재하는 상이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가치의 분배와 이익의 조정에 관여하고, 이 과정에서 타협하고 합의하는 규범과 제도를 만드는 행위가 정치인 것이다.

근대정치는 ‘시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를 핵심가치로 하여, 이 주인이 안전할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을 모색했다. 즉, 홍수, 지진과 같은 ‘자연적 재난’은 물론이고, 질병, 노령, 빈곤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일에 간여해왔다. 복지국가는 ‘사회적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안전의 정치가 만든 결과물이다.

이러한 ‘안전의 정치’는 공장, 군대, 학교, 가정 등 모든 공간에서 행해졌고, 선진국 시민들은 각종 위험으로부터 ‘사회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전시스템에 의한 시민들의 보호는 시민들이 안전의 정치에 깊이 참여함으로써 얻어진 것이었다. 즉 안전의 정치는 시민들의 자기보호인 것이다.

‘천암함의 비극’과 위험사회

최근 46명의 병사와 함께 천암함이 침몰하고, 이를 구하기 위해 나섰던 한준호 준위가 순직했으며, 9명을 태운 민간 어선 금양98호도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연이은 비극에서 이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본다. 우리는 기본적인 재난에 대해서조차 안전의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위험사회에 살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천안함은 비상사태에 대비한 대피훈련을 거의 하지 않았다. 사고 이후 군과 정부의 대처는 재난 대응 매뉴얼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든다. 사고의 수습과정에서 벌어진 또 다른 희생들은 안전불감증의 사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 큰 문제는 안전의 정치에서 시민들이 철저하게 배제됐다는 사실에 있다. 이 비극적 사건을 이해하고, 토론하고, 성찰할 수 있는 권리는 군 수뇌부와 정부에게만 있는 듯이 보인다. 현장에 있던 생존자는 격리돼 그 증언을 들을 수 없고, 사건당시 기록인 TOD 동영상과 교신기록은 편집 또는 비밀에 붙여졌으며, 사고시각이 계속 달라지고 군 발표와 다른 정황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사건 조사를 위한 민관군합동조사단 대부분도 군관계자와 군과 관련된 업체, 연구소 등의 인사여서 이후 그 결과를 믿을 수 있을까. 시민들에 대한 안전의 정치가 아니라 선거를 앞둔 정치꾼들과 책임을 모면하려는 군의 ‘셈법의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의심이 드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각된 시민과 정치로의 귀환

시민들을 위한 안전의 정치가 작동해 온 서유럽의 역사는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위험사회가 극복되었음을 보여준다. 자각된 시민들은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를 통해, 참정권의 획득과 선거를 통해, 비판, 토론, 참여를 통해 안전의 정치를 그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와 실천으로 만들었다.

실종자가족협의회가 또 다른 희생 앞에서 사실상 구조의 포기인 수색작업 중단을 요청했다. 정부와 군이 ‘셈법의 정치’에 골몰할 때 시민들이 다른 시민들을 보호하려는 ‘안전의 정치’를 하고 있는 증거이다. 군과 정부가 동영상을 공개하는 등 적극적인 해명에 나선 것은 시민들에 대한 눈치 때문이다. 안전의 정치가 그나마 작동할 수 있는 것은 여론 때문인 것이다.

천암함의 비극은 우리 사회가 기본적인 재난조차 대처하지 못하는 위험사회라는 것과 시민들의 안전은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달리 말하면, 현재의 위험사회는 시민들의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이라는 토양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 상황이라면 천암함과 같은 비극은 ‘바다’뿐만 아니라 ‘땅’과 ‘하늘’에서도 되풀이 될 수 있다. 시민들이 정치로 귀환할 때 자연적 재난은 물론 사회적 위험이 안전의 정치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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