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석 인하대학교 사학과 강사
진주 촉석루 앞의 의암은 그리 험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식은땀이 흐를 만큼의 위엄은 갖고 있다.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비범함은, 그래서 의암 앞에 맨 몸으로 서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슴을 치며 다가온다.

3·1운동 당시 병원으로 검진을 가던 수원의 기생들이 경찰서 앞에서 대뜸 만세를 부르다 투옥된 일도 있거니와 과거 ‘천한’ 기생들이 보여준 꼿꼿한 자존감은 범인들로서는 감히 따라잡기 힘든 면모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자존감이 그저 자아도취에만 그치지는 않아서 생불이라 일컫던 지족선사를 유혹해 파계시킨 당대의 명기 황진이도 서경덕에게만은 무릎을 꿇고 제자가 됐다는 이야기도 전하지 않는가.

이들 기생들이 즐겨 이름에 사용하던 한자가 있었으니 ‘화(花)’, ‘소(笑)’, ‘월(月)’, ‘춘(春)’, ‘향(香)’ 등으로, 앞서 말한 절개와는 어울릴법하진 않아도, 나는 그중의 으뜸을 ‘향’이라는 글자에 두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향’을 이름에 애용하는 습관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취향이었던 듯해서, 가령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던 시절의 인천 화류계, 즉 인천 권번에 속한 일본 예기들의 이름은 흔한 아사코(朝子)를 비롯해 코코(好子), 아이코(愛子), 에미코(笑子) 등이 대세를 이룬다. 이도령과 방자의 눈을 멀게 한 춘향이와 향단이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다소 낯선 작명일 수밖에 없다.

향이라는 한자는 물론 향기를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에 향관을 따로 두기까지 했다지만 여인네들이 향갑노리개나 향낭노리개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민간에서도 향에 대한 집착은 강했다. 그중에도 사향은 향기 중의 으뜸이요 급할 때는 구급약으로 먹기까지 했다는데 안주인들 사이에 뇌물로 오가기도 했던 모양이다.

요즘은 외국에서 건너온 향수가 이와 같은 습관을 밀어내기는 했지만 우리의 향 습관이 값비싼 향수를 뿌리는 것과 다른 점은 첫째는 향을 대하는 태도에 있고, 둘째는 은근함에 있다. 서양에서 향수의 발명이 주변의 더러운 냄새를 막고 내 몸의 체취를 숨기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우리의 향은 본래부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었고 주변 자연의 냄새와 어울릴 때 보다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버들잎 띄운 바가지 한 사발에 나주 오씨를 왕후로 삼은 것도 버드나무 아래서 건너오는 은은한 여인의 향기가 지친 장수의 후각을 자극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황석영이 「장길산」에서 모티브로 삼았던 조선시대 여환의 반란은 그의 처 무녀 원향과 함께였으니, 향녀를 앞세워 도성을 무너뜨리고 미륵세상을 열고자 했던 여환의 무리가 꿈꾸던 세상도 예사롭게 다가서지는 않는다. 더구나 인천은 여환의 도당으로 인해 현으로 강등한 전력까지 갖고 있는 땅이 아닌가.

향에 대한 집착은 신라의 화랑도에서 절정을 이루어 김유신이 이끌던 향도를 용화향도로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화랑도는 향도이기도 했다. 물론 불교적 의미가 담겨 있기는 하겠으나 나라를 지탱하는 젊은이들을 향기로운 무리로 바라본 신라인들의 시선은 부러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잠시 시간을 내서 부평 거리로 나가보자. 이미 밥 짓는 냄새가 거리에서 사라진지는 오래지만 한참을 거닐며 코를 벌름거려도 이상하리만큼 아무 냄새도 들어오지 않는다. 무취의 거리, 색은 있으나 향은 없는 거리, 부평의 가로는 그러한 인상을 풍긴다.

부평이 걸어온 길은 도시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봄날이 온다. 굴포천의 악취를 없애는 데 힘을 들이는 만큼 부평을 향기 있는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데도 능동적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따뜻한 봄날, 수주 변영로의 싯귀가 어느 때보다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하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 보이지 않는 꽃에 입김만이 / 그의 향기로운 사랑 안에 지저기 거리노나’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