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주 대학원생
변비에 관한 짧은 단상

길지는 않았지 너와의 시간 하지만 넌 지금도 내 안에 / 뿌리를 내린 듯 움직이지 않는 너를 이제 보내려 해
왠지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왠지 오늘은 나를 아프게 / 항상 하던 이별이 오늘따라 왜 이리 힘겨워 눈물이 난다 / 밀어낸다 내 안의 너를 힘이 들지만 너를 보내련다

‘노라조’라는 밴드의 신곡 가사의 일부분이다. 쭉 읽어보면, 헤어지려 하지만 쉽게 헤어질 수 없는 사랑과 미련의 아픔을 그린 듯하다. 노래의 마지막 구절에 가면 끈질긴 인연의 실체가 드러나는데, 참으로 기가 막히다.

돌아가는 너를 보내며 멀어져가는 내게 안녕하며 / 이제 나도 야채 먹을 거야 우유 요구르트 고구마 안녕 내 변비여

아하, 그게 변비였어? 무릎을 치며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 기막힌 반전이다. 그런데, 이 반전 때문에 이 노래는 ‘방송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구태의연한 사랑타령이었으면 괜찮았을 것을, 재치 있는 반전의 묘를 살린 것이 화근이었다. 혐오감을 준다나 뭐라나? ‘배설물=혐오감’이란 이야기? 심사위원들은 이 노래 가사의 전체 맥락은 전혀 보지 않고 노래 제목인 ‘변비’와 노래의 마지막에야 등장하는 ‘변비’만 본 것이다. 무식한 것도 정도가 있다는 생각이 불끈 샘솟는다.

35개 채널 장악한 국민과의 대화

지난달 27일 이명박 대통령이 텔레비전에서 국민과의 대화라는 걸 했다. 주관방송사인 MBC는 물론이고 지상파 3사와 케이블방송국까지 총35개 채널이 이 프로그램을 방영했으니, 방송채널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대화’였다고 할 수 있다.

독점과 대화가 과연 어울리는 조합인지는 모르겠다. 어릴 적 저녁 9시를 알리는 ‘땡’ 소리가 나면 모든 방송국의 뉴스에서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하는 ‘땡전뉴스’를 내보내던 그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긴 땡전뉴스를 제작하셨던 화려한 이력을 지닌 분이 방송국 사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는 시절이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긴 하다.

아무튼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는 35개 채널을 통해 전국 곳곳에 방송이 나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민과의 대화’라는 타이틀을 내건 대통령의 소신(?) 발표가 35개 방송채널을 타고 전국 곳곳에 ‘선포’되었다.

국민과의 ‘대화’라고 이름을 내걸었으나 그곳에 대화는 없었다. 세종시든 4대강이든, 국민들의 이견과는 상관없이 대통령의 생각대로 밀어붙이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굳은 의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어떤 질문도 회피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자유게시판 하나 마련해 놓지 않은 대화였다. 간혹 나오는 반론에도 일방통행의 답변과 그 다음으로 넘기는 진행 기술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오로지 대화가 존재했던 것은 ‘국민과의 대화’라는 그날 방송의 제목뿐이었다. 전체 맥락을 보지 않고 제목만으로 성격을 규정해 버리는 청와대의 판단력은, ‘변비’라는 노래에 방송부적격 판정을 내린 심의 결과와 참으로 닮았다.

포르노, 맥락이 거세된 정치

“포르노냐, 예술이냐?” 노출 정도가 큰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나오는 시비다. 사실 포르노와 예술을 가르는 것은 노출의 정도가 아니라 맥락이다. 전체 이야기의 맥락에 필요한 노출이라면 그것이 포르노라는 딱지를 받을 이유가 없다. 맥락 없이 그저 벗기기만 하는 영화를 두고 포르노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맥락 없이 타이틀만으로 혐오스러움과 대화를 판단하는 요즘의 정치는 영락없는 포르노다. 요즘의 정치는 말초신경을 건드린다. 화를 내든 열렬히 환호하든 아예 냉소적이 되든, 정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대화와 토론과 협상의 맥락은 거세된다. 맥락이 거세된 정치는 포르노일 뿐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