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 전남 벌교<하>

 

<필자주> 벌교로 태백산맥 문학기행을 간다는 메일을 인천연대로부터 받았을 때부터, 바쁜 여러 가지 일정 때문에 갈 수 없고 가서도 안 된다는 생각과,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결국 모든 것을 물리치고 기행을 다녀왔다.

여행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국외든 국내든 내가 다녀 온 땅이 더 이상 머릿속의 관념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구체적 현실로 다가온다는 게 여행에서 내가 얻는 가장 커다란 의미다. 이제 내게 벌교는 더 이상 상상 속으로만 그리는 낯선 땅이 아닌 곳이 되었다. 

 

▲ 벌교 앞바다 10여리를 둑으로 막아 일군 간척지가 있는 중도들판.
해방부터 1953년 휴전까지를 그린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인 벌교는 순천시와 고흥군이 교차하는 곳으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고흥군의 관문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고흥, 화순 등지에서 수탈한 물자를 수송할 목적으로 1930년에 개통된 철도 때문에, 유통과 상업이 타 지역에 비해 일찍 발달되었고 신흥도시로 번창했다.

그래서 벌교 가면 싸움 자랑하지 말라는 말도 나왔다. 벌교는 20세기 대한민국 100대 인물 중 한사람이면서 독립 운동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 자신 독립운동가이면서 대종교를 창시한, 홍암 나철 선생의 고향이다. 또한 벌교는 ‘그리워’, ‘동백꽃’ 등을 작곡한 민족음악가 채동선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내에 그의 이름을 딴 음악당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매년 그를 기리는 음악제가 열린다고 한다. 아, 그리고 벌교는 어느 지역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그 유명한 꼬막의 고장이기도 하다.

■ 소화(素花)의 집 = 문학관에서 나오면 왼쪽에 소화의 집과 현부잣집이 있다. 소화는 현부잣집 전속무당인 월녀의 딸이다. 원래 소화의 집은 1988년 무렵 태풍에 집이 쓰러졌고, 토담의 일부와 장독대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밭으로 변했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을 2008년에 현재의 자리에 복원했다. 소설 <태백산맥>은 현부잣집 신당에서 정참봉의 손자 정하섭과 소화가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장면을 보면 소설 <태백산맥>은 진한 연애소설이기도 하다.

▲ 소설 <태백산맥> 등장인물의 한 명인 소희가 살던 집.
■ 현부잣집 = 현부잣집은 2층으로 지은 대문이 특이하다. 해설을 들으니, 기와와 처마는 한옥이지만 대문을 2층으로 한 것은 일본식이란다. 대문 2층에 오르면 벌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는데 아쉽게 문이 잠겨 있어서 올라가 볼 수는 없었다. 현부자는 이곳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쏘이거나 술을 마시면서 소작인들을 감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석산 자락, 좌청룡 우백호, 배산 임수의 풍수지리 공식에 딱 들어맞는 이 집은 본래 박씨 문중의 소유인데 소설에서는 현부자네 집으로 묘사되었다. 집안에 목욕탕도 있었다.

■ 회정리 교회 = 다음 코스로 회정리교회로 갔다. 원래 김형모 목사와 신도들이 건립한 60평의 석조 교회인데 소설에서는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으로 그려진다. 또한 부상당한 안창민을 간호하고 피신하도록 도운 죄목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석방된 뒤 학교를 그만둔 이지숙 선생이 야학 교사로 일한 곳으로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어린이집 부속 건물로 쓰고 있었다. 여기서 보니 벌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김범우의 집 = 교회를 내려와 김범우의 집으로 걸어가다 보니 벌교 시내의 식당은 대부분 꼬막정식을 팔고 있었다. ‘외서댁’도 소설에서 빠져나와 식당 이름으로 버젓이 되살아났다. 김범우의 집은 원래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 소유의 집이다. 소설에서는 품격 있고 양심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그려지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벌교 들판이 다 내려다보인다.

▲ 주릿재라는 고개에 설치된 태백산맥 문학비.
■ 홍교 = 벌교의 유일한 보물인 홍교로 갔다. 홍교는 횡갯다리라고도 불리는데, 벌교 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다리로, 세 칸의 무지개모양의 돌다리이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벌교:筏橋)가 있었는데, 1728년 대홍수로 이 다리가 유실되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보시로 홍교를 건립했다. 홍교란 다리 밑이 무지개처럼 반원형으로 쌓은 다리를 말하는데, ‘홍예교, 아치교, 무지개다리’라고도 한다.

인천 자유공원 밑의 홍예문을 생각하면 된다.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됐다. 선암사의 승선교와 형식과 모습이 유사하다. 벌교라는 지명이 바로 이 벌교(筏橋 : 뗏목으로 잇달아 놓은 다리)에서 유래되었다. 뗏목다리를 대신하여 서있는 홍교는 당연히 벌교의 상징이다. 그동안 망가진 부분을 시멘트로 발라 놓는 등 관리가 소홀했는데, 1984년 시멘트 등을 모두 제거하고 화강암으로 교체한 결과 현재의 다리 모습이 되었다.

소설에서는 염상진 등이 유지들의 창고를 턴 곡식을 굶주리고 있던 주민들에게 가져가라고 쌓아둔 곳으로 나온다. 주민들에게는 전달되지 못했으나, 어쨌든 좌익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큰 힘이 되었던 사건이다. 다리 밑의 천장 한가운데마다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아래를 향하도록 한 것이 특이하다.

■ 소화(昭和)다리 = 일제 강점기 때 놓인 다리로서, 홍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상권을 빼앗기 위하여 일제가 세운 다리가 소화다리다. 다리 이름 소화는 무당 소화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원래는 ‘부용교’라 했으나 ‘쇼와(일본 이름 히로히토 연호)’연간에 만들어졌다 해서 소화다리라고 하였다.

소화 천황(昭和天皇, 1901년 4월 29일~1989년 1월 7일)은 일본의 제124대 천황으로 이름은 히로히토(裕仁)이고 어릴 적 이름은 미치노미야(迪宮)이다. 미친놈이야? 이름이 재미있다. 이 다리는 좌익이 우익에게, 우익이 좌익에게 사형을 집행하던 장소로서, 여순사건, 6ㆍ25 등 당시의 아픔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비극을 고스란히 겪어낸 ‘피의 다리’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보겄구만이라. 사람 죽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소설에서 소화다리를 묘사한 대목이다.

■ 미리내교와 철다리 = 다음에 놓인 다리가 미리내교로, 가장 최근에 놓인 다리다. 보행자만 다닐 수 있다. 야경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 전에 벌교를 떠나야 하니 안타깝다.

철다리는 벌교에서 순천으로 가는 철교다. 중도방죽이 시작되는 곳에 있다. 1930년 경전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놓인 이 철다리는 소설의 배경이었던 시절 홍교, 소화다리(부용교)와 함께 벌교포구의 양안을 연결하는 세 개의 교량 가운데 하나였다. 소설에서는 염상구와 관계있는 곳이다.

그는 벌교 주먹패 주도권 쟁탈전에서 땅벌이라는 깡패 왕초의 제의에 결투를 벌인다. 철교의 중앙에 서서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누가 더 오래 버티다가 바다로 뛰어내리는지 담력을 겨루어 여기서 지는 자는 영원히 벌교바닥을 뜨기로 한 것이다.

소위 치킨(겁쟁이)게임이다. 도로의 양쪽에서 두 명의 경쟁자가 자신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하다가, 충돌 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는 경기, 핸들을 먼저 꺾은 사람은 겁쟁이, 즉 치킨으로 몰리는 게임이다.

▲ 꼬막 요리집이 많은 벌교 시내.
■ 중도방죽, 중도들판 = 중도들판은 벌교 앞바다 10여리를 둑으로 막아 일군 간척농지다. 중도(中島, 나카시마)는 일제 강점기 벌교에 실존했던 일본인인데, 이 사람의 이름을 따 이 땅을 중도들판, 방죽을 중도방죽이라고 불렀다. 갯벌 위에 둑을 쌓았으니 그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민들을 더 열 받게 한 것은 자기들이 돌과 흙을 날라 만든 땅에서 농사를 짓는데도 비싼 소작료를 낼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다.

작가는 소설에서 간척지의 방죽을 쌓던 때, 그 어렵고 힘들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 돼지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 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허겄소…. 하여튼지 간에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눔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들 속이 워쨌겄소”

지금 중도방죽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이용된다니 세월이 무상하다.

■ 제석산 = 방죽에서 시내 쪽을 바라보니 제석산이 바라다 보인다. 산꼭대기가 임금님의 의자 모양 같아서 제석산이라는데 그건 완전히 민간 어원이고, 제석이란 불가의 용어 ‘제석천’에서 온 명칭으로 한국에서의 제석신앙은 하늘에 대한 외경 심리와 관련이 있다. 산 이름을 제석산으로 지은 것은 불교에 대한 주민들의 깊은 신심 때문이겠다.

점심을 먹으러 다시 문학관 쪽으로 갔다. 당연히 꼬막정식을 먹었다. 삶은 꼬막에 꼬막무침에 꼬막전에 꼬막젓갈에, 상위에 차려진 음식 중 꼬막 안 들어가는 게 없다. 까기가 귀찮아서 그렇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꼬막은 참꼬막, 새꼬막, 피꼬막 등으로 나눈다. 모양은 서로 비슷하지만 크기와 껍질에 패인 부채꼴 형태의 골수로 종류를 구별한다. 대체로 참꼬막은 골수가 20개, 새꼬막은 30개, 피 꼬막은 40개라고 한다. 참꼬막은 직접 갯벌에서 채취한 자연산이고, 새꼬막은 종패를 뿌려 키운 것이어서 참꼬막이 훨씬 비싸다. 꼬막은 사람의 혈액과 가장 흡사하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도 꼬막이 나기는 하지만 벌교 꼬막의 맛을 따라올 수가 없다.

소설 속에도 당연히 꼬막 이야기가 여러 군데 나온다. 정하섭과 하룻밤을 보낸 소화가 아침거리로 꼬막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고, 외서댁을 범한 염상구는 그녀를 쫄깃한 한겨울 꼬막 맛에 비유했다. 월녀가 딸 소화의 꼬막무침 솜씨를 칭찬하는 대목도 나온다.

■ 벌교 시내 = 점심을 먹고 시내를 돌아봤다. 염상구의 주 활동무대였으며, 빨치산들의 시체가 효수되었고, 후에 염상진의 목도 내결렸던 벌교역, 계엄사령관 심재모가 자신이 좋아하는 M1소총의 이름을 빌어 만든 고지로서, 조선시대에는 봉화가 있었던 장소이며, 일제 때는 신사가 있었던 장소인 M1고지(그곳에 유명한 ‘부용산’ 노래비가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 올라가 보지는 못했다), 소화, 들몰댁 등 많은 좌익 혐의자들이 고문을 받았던, 지금은 여관으로 변한 경찰서, 현부자가 주인이었던 남도여관, 주민들을 수탈한 농지조합 등을 둘러봤다. 벌교시장에 가서는 참꼬막도 한보따리 샀다. 생각해보니 벌교는 짱뚱어의 고장이기도 하다.

▲ 벌교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홍교.
■ 태백산맥문학비와 율어마을 = 벌써 벌교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버스는 훠이훠이 고갯길을 올라 우리를 주릿재에 내려놓았다. 주릿재는 벌교 쪽에서 율어로 들어가는 길에 있다. 이 재를 지나면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 때문에 빨치산들의 해방구가 되었던 율어면이 나온다.

마을까지는 내려가 보지는 못하고, 고개에서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곳 율어 주민들은 당시의 일에 대해 아직도 입을 다문다고 한다. 기 막히는 사연들이 한둘이겠는가? 그 사연들을 들어보는 일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주릿재에 있는 태백산맥 문학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벌교를 떠났다.

버스가 전라도에서는 거침없이 달리더니, 충청도 쪽으로 넘어오면서 막혔다. 결국 벌교에서 지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버스에서 보낸 후에 인천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참꼬막을 삶아 배부르게 먹었다.

그래도 질리지 않는다. 소설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봐야겠다. 대충보긴 하지만 소설의 공간을 한번 걸어보았으므로 소설의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하기야 서너 번 읽는 사람도 있다는데. 기행을 다녀 온 날 밤, 발 쭉 뻗고 편하게 누우면서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다. 빨치산들은 몇 번이나 편하게 발을 뻗고 잤을까? 맞아죽고, 얼어 죽고, 굶어죽으면서까지 그들의 신념을 버리지 않게 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끝>
▲ 신현수(부평고등학교 교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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