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옥희 비정규대안센터 소장
아이와 대화 내용이 달라졌다. 전에는 학교생활이나 방과 후 생활을 물었다면 요즘은 학교를 다녀오면 ‘손 씻었니? 혹시 열나지 않니?’라는 질문부터 퍼붓곤 한다. 며칠 전에는 학교에서 신종플루 예방접종 여부를 묻는 안내문을 아이가 가져왔다. 백신접종을 안할 수도 없고 왠지 접종하자니 주위에서 들은 갖가지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맴맴 돌면서 잠시 머뭇거린 적이 있다. 신종플루가 유행하면서 비단 나만 경험하는 일화는 아닐 것이다.

연일 쏟아져 나오는 각종 정보와 언론 기사에 예민해지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신종플루가 제일의 화제가 되고, 혹시 지하철에서 재채기라도 한번하면 타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느낌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나’를 떠올리면서 편치 않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마스크와 체온계가 품귀현상을 빗고 신종플루 예방에 좋다는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보면서 마치 우리가 신종플루유령에 휩싸인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이처럼 신종플루보다 신종플루로 인해 나타나는 갖가지 군상(群像)은 우리사회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신종플루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얼마 전 전국공공서비스노동조합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병원 종사자 중 가장 취약한 조건에서 일하는 비정규노동자들이 정부와 의료기관의 책임 회피로 신종플루 감염 예방의 사각지대에 빠져있다는 내용이다. 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청소용역노동자는 감염 위험이 있는 각종 쓰레기와 오물, 폐기물을 수거하는 일을 담당하는데도 백신접종에서 제외됐고, 간병노동자 역시 하루 24시간을 일하면서 환자 수발 업무를 하고 있어 신종플루는 물론 병원 감염에 직접적으로 노출돼있음에도 우선 접종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러한 의료기관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마스크 지급이나 예방교육 등 가장 최소한의 초지마저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의료기관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종사하는 교사들에 대한 조치도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제출한 자료를 보면 전체 교직원 48만 4354명 가운데 신종플루에 감염된 수가 2552명(11월 2일 기준)에 달한다. 교직원 189.8명당 1명이 신종플루에 감염됐거나 의심 증상을 보인 셈이다.

그러나 2008년 기준으로 현식교사를 제외한 방과후학교 교사는 초·중·고 교과 프로그램(1만 3610명)과 특기·적성 프로그램(7만 9013명)을 합쳐 모두 9만 2623명에 달한다. 그러나 교과부가 제출한 같은 자료에서 보면, 계약교사인 방과후학교 강사의 신종플루 감염여부는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쉴 권리를 보장해야한다

신종플루 국민행동요령을 보면 신종플루 증상이 의심되면 출근이나 등교를 하지 말고 진료를 받고, 신종플루 확진 또는 의심환자는 집에서 약을 복용하면서 1주일 동안 집에서 격리토록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행동요령은 마치 헌법재판소 판결과 같다. 행동요령은 맞는데 국민은 요령대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직장에서 임금이나 인사상의 불이익 없는 병가 또는 가족병가권이 없을 경우 본인도 쉴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등교시키지 않았을 때 보살필 사람이 없다. 병에 걸려 아픈 것보다 비싼 검사비와 치료비, 해고와 생활고 그리고 차별과 편견까지가 더해진 고통이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전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시민사회에서는 최소한 공무원에게 시행하는 유급휴가 권리를 모든 직장인에게 확대해야하며, 질병수당 등이 신설돼야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국민행동요령을 발표하는 것으로 정부가 해야 할 몫을 다했다는 것이 아니라면, 행동요령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돼야한다는 것이다.

신종플루를 경험하면서 호한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청소년의 불법비디오 시청이라고 했던 공익광고 문구처럼 신종플루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무엇인가를 본다. 국민 건강을 보장해야하는 의료기관이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企業)화되고, 공적의료보험제도 역시 영리화 하려는 흐름을 보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살고, 없는 사람은 죽는 세상, 더 이상 국민도 국민 건강도 사라진 세상. 신종플루 쓰나미가 지나가는 자국마다 남겨진 또 다른 재앙의 불씨를 우리 스스로 멈추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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