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부평지킴이] 부평3동 ‘신촌’ 이화오토바이자전거 김만용씨

▲ 언제 썼는지 모르는 흰색글씨의 ‘이화오토바이’와 페인트칠을 분명히 했을 텐데 다 벗겨진 자리에는 ‘선경스마트자전거’만이 선명하다. 가게 앞에 내걸린 자전거들도 이제는 녹슨 채 이곳이 자전거 취급점 임을 알리고 있다. 물론 매장 안에는 새 자전거가 진열 돼 있다.
변함없이 아침 8시만 되면 김만용(68) 할아버지는 가게 문을 열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꼬박 12시간을 기다렸다가 해가지고 난 뒤 8시 반에 가게 문을 닫는다. 하지만 그 열두 시간 동안 가게를 찾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찾아오는 손님도 별로 없지만 추석과 설 연휴 이틀씩을 제외하곤 1년 중 쉬는 날 없이 가게 문을 열어 손님을 맞는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취급하는 그의 가게엔 사려는 손님보다 고치려는 손님이 더 많고, 고치려는 것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보다 인력거나 휠체어가 더 눈에 띈다. 

“고치려고 찾아 왔는데 내가 없으면 쓰나”

▲ 오늘도 해가 저물었지만 김만용 할아버지는 여전히 가게를 지키고 있다. 이화오토바이자전거상회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촌의 유일한 자전거오토바이 취급점이다.
“이젠 돈 벌려고 일하는 건 아니지. 좋은 시절은 다 간 거여. 그래도 이일이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고 소중한 일이라 여태 하고 있는 거고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요. 사람은 일을 하고 살아하는 벱이요. 일 안하고 소일하면 멀쩡한 사람도 병나는 곳이 바로 도시 생활이라 이렇게 번듯한 내 직장을 갖고 있는 내가 복 받은 사람이여. 그리고 어쩌다 오는 손님이지만 애써 고치려 왔는데 내가 없으면 어쩌나?”

김씨는 열일곱에 고향 충북 청주를 떠나 인천에 정착했다. 처음엔 가진 게 몸밖에 없던 터라 이일 저일 하며 돈을 모았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판매하고 수리하는 가게를 내기 전 그는 제과회사에 다녔다.

그 뒤 지금의 아내를 만나 부평구 신촌에 살림집을 얻었다. 신촌은 부평미군기지 앞 부평3동 일원으로, 일제강점기 때 강제징용을 벗어나기 위해 조병창(군수공장)에 취직한 조선인들의 무허가 천막촌이었다가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집장촌이 형성됐다.

“뭐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40년 세월을 바퀴랑 붙어 산 것 같으요. 제과회사 그만 두고 여기서 구멍가게를 했는데 그도 신통치 않았던 것 같어. 그러던 중 오토바이와 인연을 맺게 된 일이 발생했고, 그 일이 내가 이 ‘두 바퀴’ 물건의 판매와 정비업으로 옮겨갈지는 몰랐어. 그 땐 또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괜찮은 물건이었거든”

사연인즉, 당시 동네슈퍼는 지금의 만물상과 다름없다. 기본적으로 식료품을 취급하지만 가정에서 필요로 한 것들을 다 들여놔야했다. 그리고 주문배달이 많아 구멍가게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한 대씩은 있었는데 그 오토바이를 누가 훔쳐가 버린 것.

김씨는 “영등포경찰서에서 범인을 잡았다고 연락 왔는데 김포공항에 버려져있다는 게요. 그래서 부랴부랴 찾아가서 집으로 끌고 오는데 부천쯤 이르러 멈춰서더니 고장이 나버렸지 뭐야”라며 “인근 정비소엘 갔더니 훔쳐간 놈이 부품을 망가뜨려놨다면서 그 양반이 오토바이 정비방법을 일일이 알려 주길래 배웠는데, 거 재미있더라고. 그래서 집에 와서도 오토바이를 분해했다, 조립했다, 하면서 정비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가게를 차리게 됐어”라고 말했다.

“가게 앞 도로가 신촌의 종로였어”

▲ 김만용 할아버지가 가게를 지키고 있을 무렵, 파지를 줍는 할머니가 나타나 바퀴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하자 찬찬히 살펴본 뒤 바람이 한 쪽이 빠져서 그런것 이라며 바람을 넣어 주고 있다. 이날 오후 그의 가게를 찾는 사람은 할머니를 포함해 세명 이었다.
그렇게 오토바이와 인연을 맺은 김씨는 부평미군기지 정문(지금은 구 정문으로 바뀜) 건너편에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판매하고 수리하는 이화오토바이자전거점을 냈다. 그렇게 신촌에 처음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취급하는 가게가 생겼고, 지금도 신촌에서는 유일하다.

지금은 아파트로 변한 산곡3동 현대아파트단지와 부평1동 동아아파트단지 모두가 미군기지터였다. 미군들이 많다 보니 당연히 이들을 상대로 돈을 벌기 위한 장사가 많았고, 그중 가장 많았던 것은 술집 중에서도 일명 ‘색시집’이었다. 게다가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경인전철이 있긴 했으나 백운역(1984년 개통)과 부안고가교(1977년 개설, 경인전철 횡단)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 일대가 번화가였기 때문에 가장 붐비는 곳이었다.

“저 동암역이나 주안으로 가려면 꼭 여기를 지나야했어. 길이 없었거든. 그땐 백운역에 건널목이 있어 남북을 이었고, 미군기지정문에서 이(김씨 가게) 앞을 지나 백운역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차가 다니고, 자전거가 다니고, 오토바이가 다녔던 게야.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가게도 잘 됐고, 그때(70년대)는 자전거도 귀한 물건이라 재미있는(수익이 꽤 생기는) 사업 중 하나였어”

잘 나가던 시절이 이제 김씨에게는 세월의 무상함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보단 노년의 여유가 흐른다. 오히려 그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며,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듯이 이 일도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85년 무렵이었나? 우리가게가 있던 곳엔 자동차정비 공업사가 들어섰어. 자전거와 오토바이는 자동차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된 거지”라며 “그래도 이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찾아. 신촌의 사람들도 많이 변하고 길도 변해 한때 ‘종로’ 뺨치는 번화가는 이제 한적한 동네 골목길로 변했지만 오늘도 가게 앞을 아이들의 자전거가 달리지”라고 웃음을 보였다. 

“바퀴 달린 것은 차 빼고 다 고쳐”

▲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자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문 김만용 할아버지는 “노인네 냄새가 나서 젊은이들이 안 오는 것 같다”고 웃으신 뒤 “사람은 노동하고 살 때가 제일 건강하고 행복할 때”라며 “지금도 바퀴 달린 것은 차 빼고 다 자신있다.”고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안 하면 사람이 병나기 마련이고, 자기가 지닌 재주로 조금이나마 마련할 수 있다면 족하기에 오늘도 변함없이 가게 문을 여는 김씨에게 두 바퀴는 인생이 가져다준 선물인 셈이다.

여전히 그는 웬만한 것은 돈을 받지 않는다. 간단한 부품이야 있는 것으로 갈아주고 부득이하게 타이어를 갈아야 한다든지, 펑크를 때워야 할 땐 재료값과 기본 품삯 정도만 받는다. 그래서 그의 가게에는 인력거와 전동휠체어가 많다.

취재를 하는 도중에 만난 부평3동 주민 홍아무개씨는 “저 양반 내가 알고 지낸지 20년은 더 넘은 것 같아요. 그런데 진짜 웬만한 것은 돈을 안 받아요. 그리고 동네에 무슨 일 생기면 자전거도 몇 대씩 기증하고 그랬는데 이 동네서 자전거 타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에요”라며 “인력거로 파지와 고물을 줍는 노인들과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이 저분한테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줬다.

이에 대해 김씨는 “뭐 내세울 만한 게 있나? 많이 벌고 좋은 일 많이 했으면 다른 데 있지 않았겠어?”라며 “다만 연장 다루는 게 재밌었어. 지금도 자동차 빼고 바퀴 달린 것은 뭐든지 자신 있는데 노인네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것 같아(하하하)”고 말했다.

취재하는 중간에도 한 할머니가 바퀴에 이상이 있다며 인력거를 끌고 찾아왔다. 상태를 본 김씨는 “바람이 빠져서 그런 것”이라고 한 뒤, 바람을 넣어주고 끌다 또 이상이 생기면 오라고 했다.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몇 푼이라도 꺼내려하자 아예 인력거를 저만치 끌어다놓는다. 잠시 후 젊은이가 자전거를 끌고 오자 부품하나를 그냥 갈아준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도 변했다. 그나마 조금 기력이 있을 때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취급하는 가게임을 알리려고 가게 앞에 전시해 둔 자전거에는 이제 녹이 슬었다. 걸어둘 때는 새 자전거와 중고 자전거로 구색을 갖췄는데 세월 따라 그들도 같이 녹슬었다. 기력이 없어 이젠 못 내려놓는단다. 자전거 가게임을 톡톡히 알리고 있는 셈이다.

김씨 할아버지는 끝으로 “모든 일에는 때가 있지.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듯이 이 일도 그런 것이여. 사람은 누구나 노동을 하고 살 때가 행복한 때지”라고 웃음 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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