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광복은 오지 않았다

정부, 진상규명·사죄배상 위해 적극 나서야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 일본의 교토부 마이즈루시 마이즈루만 해상의 배 한 척이 일순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마치 영화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처럼 배의 중앙이 쩍 갈라지면서 가운데부터 서서히 바다로 가라앉았고 선상에 있던 사람들은 ‘우수수’ 바다 속으로 휩쓸려 떨어졌다.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이후 고향으로 돌아갈 기대에 부풀어 있던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타고 있던 해군 특설군함 우키시마호는 8월 22일 일본 아오모리현을 떠나 부산항으로 향하던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돌연 마이즈루만으로 회항, 8월 24일 그렇게 의문부호만을 남긴 채 급작스럽게 침몰해 버렸다. 낯선 일본 땅에 끌려와 수년을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조국의 해방과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던 조선인들은 고향을 목전에 두고 해마의 먹이로 사라져야 했다.
그리고 60년. 강산이 여섯 번 바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고 일본정부의 사죄도 없었다. 유족들에 대한 배상은커녕 유해발굴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1975년 발족한 태평양전쟁유족회가 1992년 5월 15일 동경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그 해 8월 22일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 주관으로 교토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에 대해 2001년 8월 23일 일본정부에게 생존자 중 극히 일부인 15명에게만 300만엔의 위로금을 지급하라고 판결 났을 뿐이다. 더구나 1965년 한국과 일본 정부가 합의한 한일협정서에도 제외된 이 사건은 60년 동안 캄캄한 암흑 속에서 진실을 되찾을 그 날을 기다리며 길고 긴 침묵을 견뎌 왔다.
외교통상부는 이 사건이 한일협정을 통해 피해보상 청구권이 소멸된 다른 피해 사례와는 다르다는 점을 인정, 10년 가까이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확한 희생자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5천∼7천명의 조선인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전국적으로 확인된 100여명의 생존자 중 우리 구 십정동에 거주하고 있는 강이순(83)씨를 만나 그 날의 참상을 전해 들었다.

 

“고향 간다는 생각에 그저 기쁘기만 했는데…”

전북 익산이 고향인 강이순씨는 20살이던 1943년 일본군에게 길에서 붙잡혀 일본으로 징용을 떠났다. 바깥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창고 같은 차와 배에 실려 이틀을 지내고 보니 일본 땅이었다.
“그렇게 끌려가서 2년 동안 줄창 비행기 활주로 닦는 공사만 했어. 베니아판으로 지은 합숙소에서 잠은 잤지. 일하는 동안에도 언제나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지. 그런데 갑자기 일본이 망했다는 거야. 얼마나 기뻤는지 그건 말로 다 못하지.”
그저 고향 갈 생각에 부산으로 가는 배에 타라는 일본군 말만 믿고 오른 우키시마호. 그러나 부산으로 간다던 그 배가 수천명의 동료들을 황천길로 이끌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폭음과 함께 배가 갈라지는데, 지옥이 따로 없었어”

일본인 친구의 권유도 뿌리친 채 오른 우키시마호는 8월 22일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갑자기 배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배에 탄 조선인들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전쟁이 아직 덜 끝나서 그러려니 하고 별 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들려온 굉음!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지옥이 따로 없어. 내가 제일 꼭대기에 타고 있었는데 배가 반으로 쩍 갈라지면서 밑으로 가라앉는 거야. 사람들은 비명도 못 지르고 바다 속으로 떨어지고. 배가 갈라지면서 튄 파편이 눈에 들어가서 앞도 잘 안 보이는데, 그래도 살려고 했는지 대나무로 만든 발 같은 게 눈에 띄더라고. 그래서 그걸 바다로 던지고 그냥 뛰어내렸어. 그때 가슴으로 떨어진 충격이 커서 아직까지도 병원에 다녀. 그래도 그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
배가 침몰하는 것을 바라보며 대나무 발에 간신히 몸을 의지해 바다 위를 표류하던 강씨는 지나가던 어선에게 발견돼 구조됐다. 강씨는 다행히 어선에 타고 있던 이들이 조선인이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며 천운이라고 말했다.

 

“일본 놈들이 일부러 폭파시킨 거야”
떠나기 전 일본인 친구가 승선 말려
일본 해군들 기관실로 들어간 직후 폭발

“아무래도 일본사람들은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나랑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이 있었는데 자꾸만 지금 가지말고 자기 집에서 몇 달만 있다가 가라는 거야. 그런데 어디 그 말이 귀에 들어오나? 당장 고향에 갈 수 있다는데…”
강씨는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내며 일본이 고의로 우키시마호를 폭침시켰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일본인 친구가 자신의 승선을 말린 것도 이상했을 뿐 아니라, 배가 폭파되기 직전의 기관실 분위기도 이상했다는 것.
“부산으로 가야 할 배가 자꾸 남쪽으로 가는 것도 이상했고, 폭파되기 직전에 갑자기 장교로 보이는 일본 해군들이 우르르 기관실로 몰려갔어. 일부러 폭파를 시키려고 기관실로 간 게 분명해.”


“피해 신고를 했는데 아무 연락도 없으니 답답해”
정부, 고령의 생존자 위해 진상규명 적극 나서야

어선에 구조된 뒤 강씨는 부상당한 눈과 가슴을 치료도 못 받은 채 5일 동안을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결국 5일만에 고향집에 도착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렇게 아픈 몸으로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의 참상을 가슴 한구석에 담고 산 지 60년. 올해 2월부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하 규명위)에서 강제동원 피해신고를 접수한다기에 피해 신고를 했다는 강씨는 하루빨리 그 날의 진실이 밝혀지고 일본정부의 사죄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이 이뤄지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올해가 83세인 강이순씨는 그나마 기력이 남아 있어 증언도 하고 피해 신고도 했지만, 유족회에서 조사한 생존자 중 많은 이들이 고령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있어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의 진상규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로 나서고 있다.
더 이상 일본정부의 비협조는 핑계가 될 수 없다. 그 날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진정한 광복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