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부평지킴이] 도배인생 34년 십정동 안동권씨

도배하러 갈 땐 버스타고 올 땐 걸어서

▲ 동우상사 대표 안동권(56)씨.
“도배할 때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풀 쑤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도배장비가 좋아져서 벽지를 넣기만 하면 풀이 칠해져 마치 인쇄하는 것처럼 나온다. 그걸 칼로 필요한 양만큼 만 잘라서 붙이면 되지만, 그 때는 풀 쑤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

고향 지리산자락 구례를 떠나온 스물두 살 청년에게 서울은 호락호락 곁을 주지 않았다. 십정동에서 30년 넘게 도배 일을 해온 안동권(56)씨는 그가 만난 1975년 서울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해 서울은 국회의사당 건축공사가 한창이던 때다.

안씨는 “차비 빼고는 돈 한 푼 없이 상경했으니 갈 때가 공사판밖에 더 있나? 국회의사당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일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시골에 높은 건물이 없었으니 난생 처음 보는 높은 건물에 놀랄 수밖에… 의사당 꼭대기에 물을 나르는 일을 했는데 너무 무서워서 나중에는 못 하겠더라. 그래서 인천으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이듬해 인천에 내려와서 그가 시작한 일이 바로 도배다. 서울에 있을 때 어깨너머로 사촌형이 하고 있던 도배 일을 틈틈이 익혀뒀다. 서울에서 일할 때 모아둔 돈이 있어 우선 부평구 일신동 군부대 근처에 6000원 사글세 집을 구했다. 그 다음 도배에 필요한 장비를 구해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도배 일은 풀을 쑤는 게 관건이었다. 밀가루를 풀어 끓이면 끈적끈적한 풀이 되는데 이 일이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던 것. 안씨는 “사무실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니 도배 할 집에서 풀을 쒔다. 풀 쑤는 데만 반나절 걸렸고 풀 쑨 다음 도배하는 데 또 반나절… 보통 하루에 한 집정도 도배를 했는데 그러면 2000~3000원 받았다”고 들려줬다.

그가 일했던 주 무대는 부개동과 일신동 일대였다. 일이 있을 때마다 밀가루와 벽지는 부평시장에서 구입했다. 차츰 도배 일이 손에 익고 동네에서 도배 일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해 한푼 두푼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문은 더 멀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살기 위해서 정말 밤낮으로 일했다. 낮에 한 집, 밤에 한 집 할 정도가 됐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돼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며 “계산동(인천 계양구)이나 서울 시청까지도 일이 있으면 갔는데 계양구 갈 때는 버스에 밀가루며 벽지를 싣고 갔다가 올 때는 돈 아끼려 걸어왔다. 서울은 전철에 싣고 다녔다”고 웃음으로 지난날을 대신했다.

“십정동 집집마다 방안 구석구석 지금도 선해”

시간이 두해 정도 흘러 모은 돈으로 중고 오토바이를 장만했다. 버스타고 걸어 다니며 일할 때보다 시간이 단축돼 일하는 양도 그만큼 늘었다. 게다가 그때 마침 풀이 나왔다. 밀가룰 풀어 일일이 끓여가며 풀을 쒀야했던 불편이 사라지게 된 것. 세상이 어수선하던 70년대 말 80년대 초 그는 부평3거리에 첫 가게인 ‘동우지엽사’를 냈다. 지금 ‘동우상사’의 전신이다.

풀이 나오니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하루에 일할 수 있는 양도 그만큼 늘었고, 가게를 얻었으니 일일이 벽지를 사러 다녀야했던 불편함도 사라졌다. 오히려 그도 이젠 벽지를 팔수 있는 지물포를 냈으니 도배 일을 하며 버는 수익에 벽지를 팔아 버는 수입이 늘어 비교적 안정적인 구조를 갖추게 됐다.

지금은 경인전철 백운역이 들어서 있고 3거리도 4거리로 바뀌었지만 동암역과 백운역 일대는 십정동에 속한다. 나름대로 부평3거리는 요충지에 속하는 곳이었던 것. 안씨가 가게를 낼 때만 해도 백운역은 없었고 부평3거리로 불릴 때다. 백운역은 부평역과 동암역 사이에 있는 기차역으로 1984년 11월 20일 영업을 시작했다.

그는 “고개 넘어 십정동 이곳으로 오기까지 부평3거리에서 한 4년 일했다. 거기도 십정동이고 여기도 십정동이라 일할 때 큰 차이가 있었던 건 아니다. 가게 형편이 그때는 그 자리가 맞았던 것”이라며 “세월이 흘러 집들도 많이 변했지만 지금도 그 때 집안 구석구석이 눈에 선하다. 이집은 창문이 어디에 있고 저 집은 콘센트가 어떻게 돼있고… 십정동에서 아마 나 모르면 간첩일 게다”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씨에게 굵직한 도배 일이 생겼다. 인천 북구청(현재 부평구, 계양구, 서구로 분구) 지하 도배 공사를 맡게 된 것. 아울러 남동구 구월동 주공아파트 도배공사도 참여하게 됐다. 그는 “나중에 손에 익으면 도배일이 둘이서 하나 혼자 하나 같다”며 “큰 공사라 엄청 힘들었다. 그래도 일이 많으니 좋았다. 점심 거르기 일쑤였는데 집에 돌아오면 양푼으로 몇 그릇씩 먹곤 했다”고 전했다.

서울의 총판업체와 ‘맞짱’뜬 부평 ‘동우상사’

4년을 부평3거리에서 보내고 십정동으로 이사 오면서 가게를 확장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부인 나윤자(53)씨를 만나 살림도 차렸다. 이때부터 도배일 보다는 벽지 도소매업의 비중이 높아졌고, 가게 이름도 동우지엽사에서 동우상사로 바꿨다.

아내가 가게를 지켜주니 그도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도배 일을 여전히 하고 있었으나 그는 벽지 도매와 소매에 신경을 더 썼다. 그리고 점차 자리가 잡혀 공장에서 물건을 직접 가져와 도매업자와 소매상에게 판매하는 총판까지 이르게 된다.

안씨는 “도배를 안 한지는 이제 한 10여년 되는 것 같다.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리 됐다. 가게 규모를 키우니 아무리 아내가 가게를 지킨다 해도 한계가 있다. 도배하던 사람이 장사를 시작하니 만만치 않았다”며 “요즘은 돈 주고 물건 가져가지만 그 땐 그런 게 있나? 오히려 물건부터 주고 돈을 나중에 받았다. 헌데 떼이는 거다. 낮에는 도배 일에, 밤에는 떼인 돈 찾으러 다녔다”고 말했다.

그렇게 동우상사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사단이 발생했다. 서울의 벽지 총판업체가 인천에 내려와 시장을 뒤흔드는 일이 발생한 것. 서울 총판업체가 자신들이 서울의 도매상들에 판매하고 남은 물건을 인천에 가지고 내려와 그보다 더 헐값에 판매했다.

이에 안씨도 가만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상도덕에 어긋난 짓을 하는 거였다. 서울 업자들이 2톤 반 트럭에 벽지를 싣고 와 뿌려대니 감당이 되나? 난 겨우 1톤 트럭인데… 그래서 맞불을 놨다”며 “서울에 가서 나도 공장도 가격으로 뿌렸다. 그랬더니 이제는 서울이 난리 나게 됐다”고 말했다.

이유인즉 서울 도매상과 소매상들이 벽지업체를 찾아가 ‘이렇게 싼데 그동안 폭리를 취했다’며 거세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중에 서울 총판업체가 안씨를 만나자고 했다. 자신들도 안 그럴 테니 제발 서울에서 물러가 달라고 사정한 것. 이에 안씨는 또 다시 상도덕을 안 지키면 언제든 서울에 올라갈 것이라고 경고한 뒤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안씨는 이제 도배 일에서 손 뗀 뒤 벽지총판만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운영했던 동우상사는 지난해 처남으로 하여금 잇게 했다. 그는 “힘들었지만 지금도 도배하던 때가 그립다. 밀가루로 풀을 쒀서 벽지를 바르면 천연재료니 사람 몸에도 좋았다”며 “일요일과 공휴일에 정신없이 도배하러 다녔던 그 때, 온 몸으로 도배를 해야 했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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