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잃어버리는 일은 스트레스 중 스트레스였다. 잃어버리는 물건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학생인지라 주로 문구류였고 훗날까지 기억을 지배했던 것은 지우개와 모자(문구류는 아니었지만)였다. 잃어버리고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지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다면 지우개와 모자는 당장 대가를 치러야 했기에 잃어버리는 즉시 그 존재감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우개는 툭하면 틀리는 글씨 때문에 바로 불편했고 모자는 교문을 지키는 ‘생활’들 때문에 무언가 어기고 있다는 죄책감을 들게 만들었다.

지우개를 하도 잃어버리자 어른들은 고무줄로 필통에 엮어주었지만 신기하게도 지우개는 간 데 없고 달랑 고무줄만 남았다. 그러므로 내가 지우개를 장만하는 일은 조만간 잃어버리기 위한 행위였다. 이 사실을 보고(다시 지우개를 장만해야겠기에)한 뒤 듣는 부모님의 꾸지람(조부모님도 함께 살았으니 그분들의 꾸지람까지 합쳐야한다)을 나는, 물건을 허투루 다루면 안 되며 절약정신을 키워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것은 경제성장을 위해 달리는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이기도 했다.

아무튼 지우개가 고무가 아니라 지우개다워진 것은 몇 년이 더 지나서였고 내 입에도 지우개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붙게 되었을 무렵, 내가 지우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더 이상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았거나 그런 것 따위 체념한 고로 신경을 안 쓰게 되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었다.

요즘 나는 길에서 종종 필기구를 줍곤 하는데 주로 연필, 볼펜 따위이다. 그런 것을 줍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줍지 않으면 그것들은 굴러굴러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쓰레기가 되거나 그대로 묻혀버릴 거라는 염려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툭하면 잃어버리던 어릴 적 기억이 땅에 떨어진 그것들을 거두게 하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잃은 것은 주인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땅에 떨어진 연필을 주울 때면 옛날에 툭하면 잃어버렸던 지우개들이 떠오른다. 지우개는 “부주의해서 자기 물건 잘 못 챙기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스스로에게 찍게 했던 물건이었다. 감히 지우개 주제에 한 인간의 존재감을 그렇게 깎아내려도 되는 거야? 물론 이것은 나중 생각이지 그 때는 그렇게 생각 못 했던 것만 보아도 내 성격은 소심 축에 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심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모자에 이르면 내 그런 소심증은 극에 이른다. 내가 모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 시작한 것은 2학년 때부터다. 신입생이라는 딱지가 붙은 1학년은 일 년 동안 모든 일에서 프리패스였다. 좀 늦됐던지라 1학년이라는 특권이 작용해 모든 규제에서 자유로웠단 사실조차 모른 채 1년이 지나갔다. 문제는 2학년이 되어서 터졌다. 모자 간수 역시 잘 안 됐던 나는 교문 앞에만 이르면 가슴 조이고 안절부절못했는데, 반복되던 그 장면이 오래도록 남아 기억을 지배했다.

한번은 등교 길에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는데 초등학생 걸음으로 이십 분 이상 걸리는 곳에 있던 학교까지 가면서 속으로 마음을 열 번도 더 바꿔 먹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날은 특별해서 모자를 사달라고 하면 크게 혼나지 않고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늘 쪼들리는 엄마한테 말했다가 혹시 그 돈이 없으면 엄마가 곤란해할까봐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 것이었다. 모자 값은 자그마치 지우개의 열 배에 달했다.

학교에 다다르도록 말하지 못하고 엄마와 헤어져 교문을 마주하고 나서야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돈으로 모자 값 이백 원이었다. 지금이야 전교생에게 모자를 씌워 검사한다는 발상은 자라나는 새싹을 짓누르는 전체주의적 발상이야, 나름대로 진단하면서 당시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게 됐지만 그때는 잃어버린 책임을 결국 번번이 자신에게 돌리고야 마는 것이었다. 이런 성격을 성인인 나는 반 농담으로 소심증이라 진단했지만 누가 얘기해주지 않는 한 당시의 어린 내가 강박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나는 내 물건을 좀체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 하지만 어려서 내가 겪었던 강박의 결과라는 생각에 이르면 현재의 습관이 반드시 다행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잃어버린 그 많은 지우개들은 어디 갔을까, 가볍게 추억할 수 있는 데 반해 모자는 좀 다르다. 아이들한테 꼭 모자를 씌워 검사해야 했을까. 지금도 내가 유니폼을 싫어하는 이유는 전교생에게 씌운 모자, 그러니까 교모에 대한 추억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생에게까지 모자를 씌워 규제하는 풍조, 그것 역시 시대정신이었다.

▲ 김경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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