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여 전, 코로나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우리 집에도 큰일이 생겼다. 변기가 막힌 거다. 양이 많지 않은 음식물쓰레기는 변기에 버리곤 했는데 그날따라 마음이 급했는지 덜 자른 송이버섯 밑동을 덜컥 변기에 쏟아버렸다. 버섯은 내려가는 듯하다가 안쪽 어딘가에 꽉 틀어박혔다. 귀찮아도 좀 더 잘게 잘라야했는데. 후회는 늦은 일. 사방에 물이 다 튀도록 ‘뚫어뻥’을 눌러봐도 소용이 없었다. 기운이 빠졌다.

이럴 땐 왜 더 화장실에 가고 싶은 걸까. 변기보다도 내 뱃속 정리가 급했다. 어디서 이 ‘큰일’을 해결하지? 자연스럽게 가까이 사는 엄마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엄마네 집에 쇠막대기로 된 변기 뚫는 도구가 있다. ‘볼 일’도 볼 겸, 도구도 빌릴 겸, 엄마네로 급히 갔다.

엄마네 집은 갈 때마다 마음이 편하다. 24년 전, 아직 외벽 페인트칠도 하지 않은 새 빌라를 가리키며 엄마가 “우리 곧 이 집으로 이사 올 거야!”라고 말했을 때, 나는 믿지 못했다. 우린 당시 산 아래 재래식 공용화장실을 사용하는 아주 낡은 집에서 살고 있었고, 여전히 가난했으니까. 그런데 몇 달 후 엄마의 선언은 정말 현실이 됐다. 새집에서 깨끗한 양변기와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샤워기를 마주하고는 무척 감격한 게 기억난다. 드디어 ‘남들처럼’ 살게 됐다는 게 기뻤다.

그 화장실에 앉아 있자니 새삼 이 공간에 고마웠다. 그때 엄마는 지금 내 나이보다 고작 세 살 많았다. 엄마에게도 이 화장실이 각별했을까.

“그럼, 말하면 뭐해. 공용화장실 쓸 때 아주 환장하겠더라고. 더러워서.”

“엄마 어렸을 땐 화장실이 어땠어? 그보다 더 더러웠어?”

“더럽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지. 옛날에는 집집마다 화장실이 있었으니까. 아, 그땐 변소였지. 예전에 옹기 만드는 사람이 있었어. 그 집에 가면 찌그러졌다든가 해서 싸게 파는 항아리가 있거든. 깊이가 한 1미터쯤 될까? 항아리 배 둘레는 어른 둘이 팔 벌려 안으면 겨우 손이 닿을 정도로 크지. 그 항아리를 사가지고 와서 집 마당 한쪽에 땅을 파고 묻는 거야. 그리고 그 위에 소나무 굵은 걸 잘라서 얹어. 사람 발 벌리고 앉을 만큼만 남기고, 항아리 위를 덮는 거지. 변소 벽은 싸리나무 같은 걸로 대충 만들어. 지붕도 짚 같은 거 이엉 엮어서 덮고. 그냥 안에 사람 안 보일 정도로만 해놔. 변소는 꽤 넓었어. 변소 한쪽에는 재를 쌓아 두더라고. 날마다 불을 떼니까 재가 나오거든. 한 번씩 할아버지가 그 재 속에 똥을 파묻어 놓더라고. 똥이 삭으면 재랑 같이 밭에다 뿌리는 거야. 최고의 거름이지. 옛날엔 소변, 대변을 아주 아꼈어.”

“나 어렸을 때 집에 요강 있었던 거 같은데.”

“그렇지. 밤엔 요강을 썼지. 그래도 똥마려우면 등불 켜고 변소에 갔어. 귀신이 아주 무서우니까 꼭 누가 같이 가야지.”

맞다. 나도 중학교 때 밤에 공용화장실에 갈 때면 언니와 동생을 데리고 갔다. 한밤중에 우르르 몰려갔다가 무서워서 후다닥 뛰어 집에 들어오는 게 번거롭긴 해도 나름 재미와 스릴이 있었다.

# 공중화장실, 수세식으로 교체

양변기

신문에서 양변기 설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의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 회장이 <동아일보>에 연재한 ‘나의 기업 나의 인생’ 회고담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휴전되기 전해인 52년 11월의 일이었다. 한국전쟁 종결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하기 직전이었다. (…) 운현궁을 숙소로 결정했는데 내부 단장과 수세식 화장실, 보일러 난방 장치를 빨리 해달라고 우리에게 요청했다. (…) 우리 상식으론 우선 화장실을 방안에 들여놓으란 게 이해가 안 됐고 그나마 양변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지 못한 사람이 많을 때였다. (…) 일꾼들을 데리고 용산 쪽의 빈 고물상과 민가를 뒤져 보일러와 파이프, 세면대, 욕조, 양변기를 간신히 구했다.”(1991.8.29. 동아일보)

1950년대에 양변기가 설치된 곳은 일본 고관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 회장의 말마따나, 변소와 집은 가능한 한 멀리 떨어트려놓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수세식 화장실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공중화장실을 통해서였다. 1959년 7월 22일 <동아일보>에 “오는 8월 1일부터 시설의 변소시설은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 수세식으로 고쳐진다”는 기사가 실렸다. 대상은 관공서와 학교, 공장, 극장 등의 건물이 있는 화장실이다. 1960년대에도 ‘도시형 공중변소’를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꾸준히 늘려갔다.

그러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신문의 독자란에는 공중화장실의 불결함에 대한 글이 꾸준히 올라왔다.

“○○구내 공동변소는 사용인은 있어도 청소인은 없다. (…) 내가 지난 6월에 한 번 보았을 때나 며칠 전 보았을 때나 여전히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분뇨가 넘쳐흐른다. (…) 보고만 있는 역 당국의 비위생적인 처사는 얼굴을 붉히게 한다.”(1966.10.22. 경향신문)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아 점점 서울로 모여드는데, 분뇨를 처리할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수시설과 정화시설을 먼저 갖춰야했다. 공장 주변 주거 밀집 지역마다 공중화장실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서 줄서기와 양보의 미덕을 배웠다.

# “학교 화장실이 무서워요”

1960년대부터 서울에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아파트 건설을 추진했지만, 영세민용 26㎡(약 8평) 아파트의 입주금이 1966년 기준 17만 원이었다고 한다.(1966.4.8. 동아일보 ‘내 집 마련은 언제쯤’) 1965년 갓 입사한 공무원 월급이 5000~6000원이었으니 거의 3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입주가 가능했다. 아파트에는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했다. 1970년 수세식 화장실은 전체 가구의 1.8%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1970년대에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늘어나 1980년에는 전국에 37만여 호, 서울에만 18만 호가 넘게 지어졌다. 전체 주택 530만 호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였다. 이 시기 신문에서는 ‘양변기’에 대한 글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저학년 어린이들에게는 변소가 ‘유령의 집’으로 알려져 대소변을 보고 싶어도 참다가 그대로 싸버리기 일쑤여서 수업에 지장을 줄뿐 아니라 어린이들의 건강을 해칠 우려도 크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최근 몇 년 사이 곳곳에 아파트나 서구식 가옥 등 현대식 주택이 많이 들어서면서 오랫동안 집에서 수세식 양변기를 사용하던 어린이들이 학교에 들어간 뒤 재래식 변소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1978.11.21. 동아일보)

“곳곳에 현대식 아파트나 서구식 가옥이 들어서면서 집집마다 수세식 양변기를 갖추고 있다. 이 양변기 사용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취학하면서 학교의 재래식 변기에 익숙지 못한 데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1980.7.10. 동아일보)

학교 재래식 변소를 수세식으로 바꾸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양변기를 사용하던 아이들이 재래식 변기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근거는 설득력이 약하다. 학교 화장실은 깊이가 깊고 내부가 어두워 강심장이 아니고선 아동이 혼자 들어가기 어렵다. 양변기를 사용해 본 적 없는 아이라 해도 충분히 무서움을 느낄 만하다. 1980년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가구는 전체 가구의 18%밖에 되지 않았다. 80%에 달하는 아동의 감정을 소외시켜서라도 양변기 설치를 촉구하려는 당시 지식인의 목소리는, ‘80대 20’의 승자독식 사회가 이미 그 시절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한편 이런 기사도 있다.

“마을 사람들은 변소보다 다른 소독사업이 더 급하다고들 반대도 했지만 결국 집집마다 하수도를 묻고 옥외 수세식 변소를 짓게 됐다. 그러나 양변기를 단 집은 하나도 없다. ‘며느리와 어떻게 한 요강에 앉느냐’는 노인들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양변기를 달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뒷얘기다.”(1978.7.4. 경향신문)

# 950만 원 금제 양변기 등장

양변기는 청소만 잘하면 오물 냄새가 나지 않는다. 보기에도 깔끔하다. 양변기가 집안에 들어서면서 변소는 목욕실을 겸할 수 있게 됐고, 이때부터 변소는 화장실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렸다.

1980년대 경제 성장기와 부동산 열풍으로 아파트와 고급 주택이 급격히 늘었다. 건축자재가 없어 건축이 중단될 지경이었다. 동시에 고급화 바람도 불었다. 백화점에 등장한 일제 양변기 하나가 구설수에 올랐다.

“3000만 원하는 양탄자, 950만 원의 양변기, (…) 300만 원짜리 핸드백이 서울시내 유명백화점 수입품 코너에서 불티나게 팔린다. 평당 20만원 하는 타일, 40만원이 넘는 접시도 없어 못 팔 지경이며….”(1989.7.8. 동아일보)

“한여름에도 더운물이 펑펑 쏟아지고 건강생수만 마시며 사는 초고층 아파트 창 너머로 오염된 수돗물을 받기 위해 밤새 뜬눈으로 지새야하는 철거민 천막촌이 바라다보이고, 수백만원짜리 금제 양변기를 수입해 쓰는가 하면 아침이면 하나뿐인 판자 공동화장실 앞에 여러 세대의 주민들이 길게 줄을 서고 (…) 8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사실적인 생활풍속도는 이런 모습으로 그려질지 모른다.”(1989.12.29. 한겨레)

1990년대에 전체 가구 화장실의 수세식과 재래식의 비율이 비슷해지기 시작해 이후 재래식의 비율이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자료를 보면, 1990년 전체 가구 화장실의 수세식과 재래식 비율은 51대 48, 1995년 75대 24, 2000년에는 87대 12였다. 2015년엔 98대 1로, 비율로만 보면 재래식 화장실은 거의 사라졌다.

# 여전히 남은 26만여 가구

나는 새집으로 이사 온 후 화장실에서 신문 읽는 재미를 알았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물을 맞고 서 있으면 하루의 긴장과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하루 최소 두 번, 어쩌면 그 이상 들어갈 수밖에 없는 곳.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오물과 때를 덜어내고, 기본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장소. 나는 화장실에 있을 때 제일 마음이 편했다.

새집과 화장실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이전 집에서 공용화장실 사용 그 자체가 크게 문제인 건 아니었다. 나를 주눅 들게 한 건 우리 집 환경이 친구들의 것과 많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당시 나는 24%에 해당하는 재래식 화장실 사용 가구에 속했다.

그래서일까. 98%에 가려진, 이제는 더욱 적어진 숫자 ‘1’에 마음이 쓰인다. 2015년 현재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가구 수는 1.3%인 26만1281이다. 친환경적 삶을 위해 본인이 선택한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는 이 숫자를 극단적으로 적게 만들어야한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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