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연평해전이 일어난 지 7년이 지났다. 한국군 6명이 전사했지만 터키와 월드컵 3·4위전을 치르고 있던 같은 날의 전투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경기장의 군중들이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군의 죽음을 애도하며 ‘우리는 형제’라고 외칠 때 서해에서는 또 다른 형제들이 파도 위에 피를 뿌렸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장면인가.

하지만 이 날의 비극은 오래 기억되지 못했다. 이보다 앞서 1999년에 일어난 제1연평해전 당시의 북한군 전사자가 30여명 이상이었다는 해군의 발표를 기억해 내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승전 기념식, 혹은 추모식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정부 주관 행사가 가끔 그 날의 사건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대중들의 기억이란 이처럼 잔인한 것일까. 뇌 속에 잔류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될 땐 가차 없이 밖으로 밀어내는 선택과 망각의 기술. 단지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보인 사람들의 기억 습관을 생각하면 역사의 기록이란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하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가슴 속에 잔류시켜놓기는 했으나 아무도 선택해 주지 않아 꺼내서 보여줄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을 끄집어내어 기록해두는 일이 어쩌면 소수의 한풀이에 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가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기록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면 그것이 진실의 전부인양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일수록 보다 다양한 기록을 생산해낼 필요가 있다. 더구나 사람들의 체험과 관계된 일이라면 우선순위는 더 높아진다. 그것이 과거의 명암을 조금이라도 밝혀낼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출구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지 한번 봇물이 터지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은 직·간접적 체험을 끝없이 쏟아내기 마련이다. 제주 4·3항쟁이 그랬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이 그랬다. 최근에는 태평양전쟁 시기의 강제동원 피해사례를 규명하면서 피해자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5년 1차 피해 신고 시에만 20만명을 넘어섰고 작년부터는 2010년 6월까지 지원금 지급 등을 위한 신청을 받는 중이다. 거의 800만명에 달하는 연인원과 비교하면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해도 과거 몇몇 학자와 단체들만이 힘겹게 추적해가던 시절을 생각하면 상당한 성과다. 부평지역에서도 다수의 사람들이 신고를 완료한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전혀 사례가 소개되지 않고 있는 것은 한번 되돌아볼 일이다.

과거사를 밝히기 위한 노력이 다방면에서 줄기차게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부평지역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건을 하나 든다면 한국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작년 6월 백운공원에 9억원을 들여 6·25전적비가 건립된 바 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부평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기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2, 3일간 산발적으로 진행된 전투를 제외하면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부평지역은 사실상 장막으로 드리워져 있다. 알려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부평지역은 대한청년단이나 서북청년단, 좌익 계열의 단체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고 전쟁 중에는 인민위원회가 설치됐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미군 부대와 반공포로수용소가 설치되기도 했다. 계양산 인근 지역으로는 양 진영 간의 학살 사례도 소문으로 전한다.

승전의 기쁨만이 아니라 전쟁의 비극 또한 넘쳐흐르던 곳이다. 우리가 이 시대의 모습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기까지 하다.

며칠 후면 한국전쟁 59주년이 된다. 전쟁은 기념비만으로 정리될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외면하지 말자.
▲ 김현석
인하대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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