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지난 주말 엄마와 집 근처 카페에 다녀왔다. 우린 그곳에서 파는 밀크티를 좋아한다. 맛있는 음료를 마실 겸, 다리도 쉴 겸, 한 시간 정도 앉아 얘기를 나누다 집에 돌아왔다. 며칠 후, 내가 사는 동네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는 뉴스가 나왔다.

다음 날 그 확진자의 동선이 인터넷에 뜬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엄마와 내가 밀크티를 마시던 그 순간, 확진자가 같은 건물 지하에서 밥을 먹고 있었던 거다. 그날 내 움직임을 재빨리 복기해 보았다. 혹 내가 지하에 내려간 적이 있던가. 기억엔 없지만 아무래도 찜찜했다. 나이 든 엄마가 더 걱정이었다. 확인을 해보자 싶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그날 우리 지하에 안 갔어. 괜찮아.” 평온한 목소리에 내가 더 당황했다. “옛날에 죽을 뻔하다가 살아서 그런가? 나는 별로 걱정이 안 되네. 사람 목숨은 정해져 있는 거 같아.”

아, 기억난다. 엄마는 예전에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얘길 자세히 들어보기로 했다.

“두 번 크게 아팠지. 열한 살쯤 땐가, 학교에 못 갈 정도로 열이 엄청 많이 났어. 하도 안 나으니까 할머니가 밤에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라고. 마당에 소가 있는 거야. 우리 집엔 소가 없었는데, 저게 뭔가 했지. 바닥에는 멍석이 있고 말이야. 할머니가 나더러 멍석에 누우래. 그러더니 늬 외삼촌이 나를 둘둘 말더라고. 아무것도 안 보이지. 근데 소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라고. 소가 멍석 위로 안 밟고 잘 건너가면 병이 낫는다는 말이 있었나 봐. 그래서 소를 빌려온 거야. 나는 안 밟혔지. 신기하더라고. 그 뒤로 어떻게 나았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간 굉장히 아파서 힘들었던 기억이 나. 나중에 들어보니 그게 학질이라고 하더라고.”

학질은 말라리아의 다른 말이다. 말라리아 병원충을 가진 모기에게 물려 발생하는 병으로 사람 사이에 가벼운 신체접촉으론 전염되지 않는다. 당시 할머니가 엄마의 병을 학질이라고 단정한 이유가 있다. 엄마의 증상이 격일로 나아졌다가 심해졌다가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 열이 없다가 다시 발열, 해열을 반복하는 하루거리 발열은 말라리아의 특성이다.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땐 그나마 빨리 나은 거지. 스물한 살쯤엔 훨씬 더 아팠어. 겨울엔 농사를 안 지으니까 내복 팔러 이 동네 저 동네 다녔어. 그날따라 내복 사는 사람이 많은 거야. 사람들이 돈 대신 쌀이랑 고기를 주더라고. 쌀 서말을 받았으니 25킬로그램이 넘는 걸 머리에 이고 한 시간 반이나 걸어서 집까지 온 거지. 다음 날 아침에 또 내복을 팔러 나가는데 눈보라가 막 몰아치더라고. 잠바가 있길 해, 코트가 있길 해. 얇은 겉옷 하나 입고 걷는 데 너무 춥고 손도 시리고 힘들어서 도저히 못 가겠다 싶어. 저만치서 오토바이가 오기에 무작정 세웠지. 그 아저씨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그 아저씨 못 만났으면 집 가는 길에 쓰러져 얼어 죽었을 거야.”

이건 죽다 살아난 게 아니지 않나? 갸우뚱하는 순간 엄마가 말을 이었다.

“그날 집에 오자마자 막 머리가 빠개져나가는 거 같아. 온몸이 쑤시고 밥도 못 먹고 일어나 앉지도 못했어. 그날부터 석 달을 앓았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 보고는 다들 그랬어. ‘쟤 죽겠다’고. 그땐 병원에 갈 줄도 몰랐지. 늬 할아버지가 의사한테 내 얘길 했나봐. 그 의사가 셉트린나 박트림 약을 사 먹으라고 했대. 아침저녁으로 먹는데, 두 알에 300원이었어. 엄청 비싼 거지. 내가 잊어버리질 않아. 약을 사 먹을 돈이 없었지. 근데 늬 외숙모가 결혼반지 판 돈을 놓고 가더라고. 그거 먹고 나았어. 동네 사람들 다 놀랐지. 그게 홍콩독감이라고 그러대. 그게 전국적으로 유행이었거든. 나중에 알고 보니 항생제를 먹고 나은 거더라고.”

#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엔 전염병이 있었다

예방 접종 이미지.(출처 아이클릭아트)

‘전염병은 일 년 열두 달을 두고 없는 달이 없지만 특히 여름철은 전염병이 많이 유행하는 달이다. (…) 여름철에 제일 많은 병이 소화기 계통의 질병이고 다음이 뇌염이나 학질 같은 병인데 이것들은 주로 유해곤충에 의해서 매개가 되는데 위장 계통의 병은 주로 파리가, 뇌염이나 학질은 모기가 매개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 그러므로 먼저 쓰레기통 하수도 변소 등 더러운 곳을 깨끗이 정리하고 나서 DDT(디디티) 같은 구충제를 쓸 것 같으면 자연 이런 곤충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1954.6.27. 동아일보)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엔 전염병이 있었다. 엄마는 병을 두 번 앓았지만 평소엔 전염병을 크게 신경 쓰고 살진 않았다고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줄도 몰랐던 시골 오지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동네는 달랐다. 장질부사라 불린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천연두, 백일해, 뇌염, 콜레라, 결핵, 홍역 등 종류도 많은 전염병이 늘 주위에 도사리고 있었다. 가장 많은 감염자를 낸 전염병은 장티푸스였다.

‘작년 전염병 발생 통계를 보면 장티푸스가 으뜸으로 3931건 발생에 사망 38명, 다음은 일본뇌염이 1226명 발생에 사망 396명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1969.6.5. 동아일보)

방역과 소독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예방접종을 의무화해야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1968년 보사부는 예방접종 의무제 실시 계획을 세웠다.

‘보사부는 69년엔 일차로 2세 이하 어린이 150만 명을 대상으로 카드를 배부, 천연두, 디프테리아, 백일해,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등 예방접종을 의무제로 실시할 계획이다.’ (1968.9.13. 동아일보)

그러나 이듬해 계획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보사부는 이 개정안에서 현행법상 제1종 전염병에 대한 예방약에 대해서는 국가 부담을 하게 돼 있으나(…) 일본뇌염, 홍역 예방약 등 값이 비싼 약에 대해서는 수요자들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사실상 1종 전염병에 대한 국가 부담 의무는 백지화된 셈이 됐다.’ (1969.4.12. 경향신문)

신생아 예방접종은 1974년부터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오는 4월부터 출생하는 모든 어린이는 어린이예방 접종기록카드를 갖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실시되는 이 카드제는 만 6세 이하 어린이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결핵(BCG), 종두, 디프테리아, 백일해, 파상풍, 소아마비 등 여섯 가지의 예방접종 여부를 의무적으로 기록, 각 가정과 보건소에 비치토록 한다는 것이다.’ (1974.3.18. 동아일보)

그러나 이 법안 또한 가장 중요한 홍역과 건강을 크게 위협하는 간염은 빠져 있었다.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홍역 접종을 무료로 해줄 수 없고, 그래서 의무화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홍역은 1982년에 의무 예방접종 목록에 추가됐다.

# 예방접종 기피 이유는

이렇게 예방접종을 할 기회가 늘어났음에도 전염병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예방주사에는 부작용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예방접종 의무화 몇 해 전, 다음과 같은 사건이 터졌다.

‘장티푸스 예방주사를 맞은 진주 시내 12개 국민학교 어린이 1만9857명 가운데 장재초등학교 2학년 1반 구자복 군(9)이 부작용으로 8일 오전 5시 숨지고 약2000명의 아동들이 앓아누워 8일 등교를 못했다. (…) 한편 보건소 측은 허약체질에서 오는 쇼크로 인한 것인지 왁친에 결함 또는 접종 과정에서의 결함이 있는 것인지 여부를 가리고 있다.’ (1970.7.8. 동아일보)

이 사건은 백신 관리를 소홀히 해 변질된 것을 주사한 것이 원인으로 드러났다. 1971년에는 소아마비 주사를 맞고 5개월 된 아기가 사망했고, 1973년엔 백일해 예방접종을 맞은 아이들이 잇달아 사망하기도 했다.

‘1970년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접종사고로 어린 아기가 사망하는 예가 생기자 (…) 의사들 자신이 부작용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백일해 예방접종을 기피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 접종 기피 이후 백일해 환자 수가 71년에 8322명으로 67년 4409명에 비해 약 2배로 늘어났다.’ (1976.2.25. 매일경제)

백신 부작용은 1980년대에도 계속 이어져 1981년엔 장티푸스 예방주사를 맞은 고등학생 55명이 손발이 마비되고 뒤틀리는 부작용을 일으켰고 이중 한 명이 사망했다. 결국 정부는 그해 장티푸스 예방접종을 중단했다. 1994년엔 뇌염 접종을 받은 어린이 두 명이 중태에 빠진 뒤 사망했다.

1990년대엔 신생아에게 B형 간염 예방접종을, 2009년엔 A형 간염 백신접종을 의무화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길고 긴 과정을 거쳐 2020년 현재, 결핵과 B형 간염, 소아마비, 디프테리아, 수두, 홍역, 뇌염 등 예방 접종을 신생아와 소아에게 실시하고 있고, A형 간염은 19~39세 성인에게,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은 50~64세에게 무료 접종하고 있다. 언젠가는 코로나19 백신도 포함될지 모른다.

# 노인들이 약국 앞에 긴 줄을 서는 이유

동구보건소 예방접종 장면.<사진제공ㆍ동구보건소>

엄마를 석 달이나 몸져눕게 만든 홍콩독감은 1968년 전 세계를 휩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미국에서만 5000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1970년 우리나라에 ‘상륙’했다는데 얼마나 감염됐고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신문기사에선 찾을 수 없었다. ‘해마다 100만 명의 어린이가 홍역을 앓고 1만 명이 사망해 500명 이상이 (…) 홍역 후유증의 불행을 얻었다’(1971.3.6. 경향신문)던 시절이었다. 병명을 모르고 사망하는 일도 많았을 터. 엄마 역시 검사를 한 적 없으니 ‘감염자 1’의 기록으로도 남지 않았다.

당시 눈에 띄는 기사가 있다.

‘홍콩감기가 세계적으로 큰 피해를 일으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껏 보지 못한 지독한 감기로 환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 감기에 걸렸을 때 마스크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2차 대전 때 일본식으로, 그 효과에 대해 현대의학은 오히려 해롭다고 단정하고 있다. 마스크는 소독된 가제로 8겹이 되어야 일반세균이 통과하지 못하나, 감기 바이러스는 여과성 병원체이어서 통과되고 또한 신선한 공기의 투과율이 나빠 오히려 건강에 해로운 것이다.’ (1969.1.21.동아일보)

50년 전 언론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 같다. 미세먼지용 마스크가 품절사태를 겪는 와중에야 우린 알게 됐다. 마스크는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만 쓰면 된다는 것을. 다만 누가 감염됐는지 알 수 없으니 여러 사람이 밀폐된 곳에 함께 있을 경우 마스크를 쓰는 게 좋다는 것을. 그래도 손 씻고 마스크 쓰는 것밖에 할 게 없는 사람들은 약국 앞에 긴 줄을 설 수 밖에 없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오늘 버텨내지 못하면 내일이 없는 이들은 누구를 시켜서라도 마스크부터 구해야한다. 그런 자녀들에게 걱정을 끼칠 것이 두려운 노인들은 아픈 다리를 무릅쓰고 몇 시간을 기다린다. (…) 평범하게 살아도 누구나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받는 사회였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공포심을 느끼지도, 유난을 떨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썼다(2020.3.8. 경향신문). 병이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전염병은 현상일 뿐, 본질은 병든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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