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인천투데이] RPA가 슬슬 모습을 드러낸다. AI(인공지능)의 유행을 타고, 단절과 혁신의 중간지대쯤에서 도약을 준비 중이다. RPA는 디지털 레이버(Digital Labor), 혹은 디지털 워커(Digital Worker)라고 부르는 숨은 노동자들에 의해 가동된다. 알파고가 바둑에서 인간을 이길 때, 이런 형태의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이 이끌 미래는 이미 대전환의 실루엣을 보여줬다.

RPA의 증조부쯤 되는 기술이 MS-DOS 시절에 사용하던 배치 파일 정도가 아닐까 싶다. 깜박깜박 신호를 보내는 커서를 따라 명령어를 입력하면, 파일을 찾아 처리하고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일련의 과정을 컴퓨터가 자동으로 수행했다.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아도 기계가 알아서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는 건, 지금 생각하면 초기 디지털 사회에서 경험한 원시적 희열이었다.

그후 OA(사무자동화) 개념이 확산됐고,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매크로 기능은 마술과도 같았다. 수백 개의 단어들을 고치라고 매크로를 걸어두면 마치 춤을 추듯이 모니터 안에서 커서가 날아다녔다.

그렇다고 해서, 로봇이 일을 한다거나 업무에서 인간이 배제된다거나 하는 논란을 크게 불러일으킨 적은 없다. 군대에선 아직 사람 손으로 차트를 쓰던 시절이니, 그저 좀 편한 기술이었을 뿐이다.

소프트웨어에서 로봇이란 단어를 흔하게 접하게 된 건, 초기 인터넷 검색 브라우저인 넷스케이프가 나타난 이후다. 검색 로봇이란 것이 전 세계 웹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한다는데, 어느 곳에도 ‘중심’이 없다는 인터넷 개념을 이해하기도 어려운 판에 로봇이 그 안에서 일을 한다는 건, 한동안 암호 같은 말로 남아 있었다.

여전히 로봇은 공장에서나 어울릴 법한 단어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도 조만간 버려야 할 지 모르겠다. 산업용 로봇의 한계를 뛰어넘어, 가상의 시스템인 일종의 ‘매트릭스’를 만들겠다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인데, 로봇이 단순히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과 소통하는 ‘교류하는(interaction) 기계’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벌써 공장을 벗어나 일상생활에 투입된 초기 버전의 지능형 로봇도 적지 않다.

Robotic Process Automation, 즉 RPA는 공장을 떠난 가상의 디지털 로봇을 활용한 플랫폼이다. 단순 반복되는 작업들을 인간 대신 소프트웨어가 처리해주는 기술이다. 당연히 규칙적인 업무가 많은 사무 현장에 광범위하게 투입되고 있다. 사람이 몇 시간동안 수작업으로 할 일을 오류를 최대한 줄이면서 몇 분 만에 처리해버리니 기업들이 기술 도입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건 당연하다.

업무시간이 대폭 줄어드니 노동자들의 워라밸이 그만큼 높아질 거란 기대도 있다. 그러나 기업들은 분명 인력 감축을 선택할 것이다. 플랫폼 노동도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노동자와 사업자의 경계는 불분명해질 것이다. 노동조합의 역할은 모호해질 수도 있고, 근로기준법은 더 이상 주목받지 않을 수도 있다. 노동의 형태는 어떤 방식으로든 변할 것이다. 그러한 시대가 도래할 때 노동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독일은 ‘인더스트리 4.0’을 발표하며 제조업 혁명을 견인하면서 ‘노동 4.0’을 함께 고민했다. 해법이 명확하진 않지만, 우리가 아직 가지 않은 길이다. 시도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도 좋을 법하다. 배치 파일의 단순함에서 시작된 자동화 기술은 폭발적인 변화를 앞두고 있다. ‘행복한 민족에게 역사는 없다’고 하는데, 잔잔한 수면 위에 던져질 디지털 혁명의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노동환경에 대한 전망은 세워둬야 할 것이다. 한국지엠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유족들이 산재 신청을 한다는데, 이마저도 신청할 수 없는 시대가 올 수도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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