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보화
번역가
지난 3월부터 동네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짐작은 했지만 교사로서 친구로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고 힘든 일이다.

초보교사로서 하루하루 아이들과 몸으로 부딪치며 사건들을 통해 배워나가고 때로는 도망가고 싶을 만큼 힘에 부치기도 했고, 스스로가 무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 하나하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교사, 기다려 줄 수 있는 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그것을 실천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와 반성의 과정을 거쳐야 할 듯싶다. 이제 막 십대에 들어선 아이들은 때로는 생기발랄하고 천진한 모습으로, 때로는 거칠고 반항적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아이들의 ‘소리 지르기’에 가까운 말투였다. 큰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에 바쁠 뿐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못한다는 점은 요즘 아이들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특징인 것 같다. 오죽하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을까.

한번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나라면 어떨까, 하고 공감해보는 능력이 요즘 아이들에게 많이 부족해 보인다. 생명을 보면 신기해하고 죽음을 보면 슬퍼하며, 좋은 일에는 기뻐하고 고통을 보면 괴로워하거나 가슴아파하는 것이 인간의 공감능력일 진대, 아이들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여 안타까울 때가 많다.

집으로 돌아오면 밤마다 아이들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애들이 왜 이러나? 무엇이 문제인가?’ 나와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니 공감되지 않고 상대에 대한 배려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자신의 삶에 대해 무덤덤할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마저 품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어지러웠다.

또한 아이들이 자기보다 강한 자에겐 꼼짝 못하고 자기보다 약한 자는 함부로 대하는 식으로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마음을 추스르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는 단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그렇지 않은가. 살벌한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의 사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삶에 대한 만족지수가 매우 낮은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한 개인이 건강한 가치관을 가지고 자기를 실현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러니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아이는 스펀지와 같다. 안 좋은 것이든 좋은 것이든 금방 금방 흡수해버린다. 사회의 유해한 환경에 가장 많이 노출돼있는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어린이다. 전쟁의 가장 큰 희생양이 어린이라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틀 속에서 그저 보고 배운 대로 따라할 뿐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요즘 아이들은 잘 놀지도,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한다. 자연에서 뛰놀며, 자기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던 우리세대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고 사준 컴퓨터·닌텐도·핸드폰에 잠시 마음을 뺏길 뿐이다. 마음껏 뛰놀 공간도 시간도 주어지지 않은 아이들은 불안한 미래를 위해 강요된 공부에 매달려야만 한다.

그러니 스트레스는 어른 못지않다. 시험으로만 평가하는 공교육시스템, 시중에 널린 입에는 달지만 몸에는 안 좋은 먹을거리, 자본의 논리가 판치는 대중매체, 그리고 어른들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꾸지람에 노출된 아이들은 거친 말투와 반항으로 자기들의 존재를 표현할 따름이다.

그러니 아이 탓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나 또한 한동안 아이 탓을 한 것 같다. “너 도대체 왜 그러니?” 그럴 만하니까 그럴 텐데, 속으로 아이에게 묻곤 했다.

짧지 않은 인생길에 아이들 저마다 받은 상처와 그 속에서 나름대로 습득한 생활방식이 있을 텐데 먼저 그것들을 어루만지고 인정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얘들아! 니들이 고생이 많다.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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