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영우의 맥주를 읽다

[인천투데이] 수도원에서 맥주를 양조하는 전통은 그 이후 오랜 기간 유지됐고, 맥주 양조 기술이 체계적으로 발달하는 데에 수도원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지금도 벨기에 등 몇몇 국가에서는 수도원 맥주인 트라피스트(trappist) 맥주가 만들어지고 있다. 벨기에 트라피스트 맥주는 하나의 맥주 스타일로 분류될 정도로 유명하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속한 수도원의 양조장 11곳에서 생산한 맥주를 말한다.

수도원.(사진출처 pixabay)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되기 위해서는 엄률 시토회(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의 규율을 따라야 하는데 묵상을 중시하는 규율 때문에 침묵의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다. 트라피스트라는 이름은 노르망디 지역의 라 트라프 수도원에서 따온 것이다. 1664년 설립된 라 트라프 수도원은 베네딕토회에서 분리되 나온 시토회에서 다시 분리돼 나온 수도원이다.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은 성 베네딕트 규칙서에서 정한 규율에 따라 생활하는데 깨어있는 시간 동안 명상과 생산활동을 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따라서 수도사들은 농사를 짓거나 상품을 만들어 판매한 수익금으로 수도원의 운영과 자선활동을 도왔다.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맥주도 이런 규율의 일환으로 전통을 이어왔다.

트라피스트 맥주를 하나의 맥주 스타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엄밀하게 말해서 맥주 스타일은 아니다. 트라피스트 맥주에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 스타일이 있기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만든 맥주라고 해서 비슷한 스타일이 아니고 수도원별로 다양한 맥주를 양조하고 있다. 오르발(Orval) 수도원의 경우 한 종류의 맥주만을 생산하지만, 네덜란드의 라 트라페 수도원은 아홉를 생산한다.

일반적으로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양조장에서 개발한 스타일인 두벨, 트리펠, 쿼드루펠 맥주가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트라피스트 맥주다. 이 스타일들은 수도원이 아닌 일반 상업 양조장에서도 모방해 생산하고 있다. 다만 트라피스트 맥주라는 명칭은 오로지 인가받은 수도원 11개에서 생산한 맥주에만 붙일 수 있다. 따라서 두벨이나 트리펠, 쿼드루펠이라는 명칭이 라벨에 붙어있다고 해서 모두 수도원 맥주인 것은 아니다.

교회, 특히 베네딕토회에서 분리돼 나온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맥주는 종교 교리와 결합해 맥주 양조의 전통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으니, 성경에서 맥주보다 와인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다소 아이러니한 일이다. 또한 아일랜드가 맥주 발전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만일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며 현지 맥주 전통을 존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가 마시는 맥주는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마틴 루터.(사진출처 pixabay)

수도원의 맥주 양조 전통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가 맥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맥주 또한 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교 개혁에 맥주가 있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독일의 소도시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는데, 이 도시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답게 와인을 마시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와인은 일요일에 성당 제단에만 올리고 신부에게 드리는 술이었고, 다른 모든 경우에는 맥주를 마셨다. 마을 분위기가 그러니 마틴 루터도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1508년 루터는 신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비텐베르크대학교에 진학했는데, 비텐베르크는 작센 주의 ‘맥주 수도’로 불리는 고장이었다. 주민 수가 2000명에 불과한 비텐베르크에 양조장이 무려 172개나 있었다. 비텐베르크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 교수로 임명된 루터는 1517년에 가톨릭교회의 폐해를 비판한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했고, 이는 곧 종교 개혁의 신호탄이 됐다.

루터의 반박문은 곧 북유럽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는데, 공교롭게도 독일, 네덜란드, 영국, 스칸디나비아 등 모두 맥주를 마시는 지역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루터에게 주장을 취소하라고 명령했으나, 루터는 교황의 지시를 무시해 1521년에 파문당했다. 교황의 명령에 불복해 파문당했다는 것은 곧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나 그를 죽여도 상관없다는 것이기에 목숨을 부지하려면 제대로 나다니지도 못할 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루터는 작센의 영주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교황이 프리드리히 3세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루터를 적극적으로 잡아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3세는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변론할 수 있게 기회를 줬다. 라인 강변에 위치한 보름스는 와인만 마시는 지역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루터의 친구 에리히 1세는 보름스로 아인베크 맥주 한 통을 보내줬다. 생사를 가를 변론을 준비하고 있는 루터가 편안한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게 평소 그가 즐기는 맥주를 보내준 것이다. 그 후에 루터는 에리히 1세에게 감사의 뜻을 여러 차례 표했다. 아인베크 맥주는 루터가 가장 좋아한 맥주였다.

보름스 제국 의회에 출석한 루터는 자기주장을 철회하지 않았고, 결국 파문이 확정됐다. 그 결과 루터는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창시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됐다.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이 확정된 루터는 목숨을 위협받게 됐는데, 프리드리히 3세의 비호를 받아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고, 1552년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맥주를 즐기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루터는 “술집에 앉아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교회에 앉아 술집을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고 반박했다. 루터는 그만큼 맥주 애호가였고, 자신의 전용 맥주잔에 있는 장식 세 개에 각각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셋을 다 외우며 맥주를 마실 정도였다.

마틴 루터는 한때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Katarina von Bora)와 결혼했는데, 결혼식에 쓰기 위해 맥주를 무려 440리터나 주문했다. 카타리나는 수녀원에 있을 때 맥주 양조법을 배웠기에 집에서 맥주를 빚었다. 맥주를 좋아한 루터는 아내가 만든 맥주도 좋아했지만 다른 맥주도 많이 마셨다. 1530년대 카타리나가 쓴 가계부에는 한 해 지출한 비용으로 고기에 300굴덴, 맥주에 200굴덴을 썼다고 기록돼있다. 빵에는 50굴덴밖에 지출하지 않았다. 루터가 얼마나 맥주를 즐겼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맥주를 마시면 잠을 잘 잔다. 잠을 잘 자면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안 지으면 천국에 오른다”는 경구는 독일 술집의 벽이나 맥주잔 장식에서 지금도 발견할 수 있는데,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루터가 한 말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루터가 맥주 애호가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공교롭게도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즉, 신교와 구교를 가른 경계선은 대체적으로 맥주를 마시는 지역과 와인을 마시는 지역의 경계선과 일치했다. 맥주를 마시는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자리 잡았으니 맥주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고 하겠다.

홉.(사진출처 pixabay)

맥주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재료인 홉 또한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홉 사용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코르비 수도원에서 나왔고, 코르비 수도회의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저술한 ‘자연학(Physica)’에서는 홉을 술에 넣으면 홉의 쓴맛이 부패를 막고 보존성을 높인다고 기술하고 있다. 힐데가르트는 훗날 홉 재배인의 수호성녀가 됐다. 당시에는 맥주에 홉보다는 그루이트(Gruit)라는 허브를 주로 사용했는데, 홉의 특성과 비슷한 성질을 가진 그루이트는 수도원에서 독점사용권을 가지고 있었다. 독점사용권을 가진 수도원은 맥주 양조인에게 돈을 받고 그루이트를 사용하게 허가했다. 그루이트 사용권은 일종의 맥주세로서 가톨릭교회에 막대한 수입을 안겨줬다.

반면에 홉은 공짜였다. 홉 사용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거두어들이는 그루이트 사용권 수입은 줄어들었고, 마틴 루터가 95개 조의 반박문을 발표한 이후에 교회는 그루이트 사용권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종교 개혁에서 맥주는 의도치 않게 큰 기여를 한 셈이다.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한 개신교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듯 개신교는 처음부터 맥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개신교는 맥주뿐 아니라 음주 자체를 죄악시하는데, 음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개신교 전통에는 맞지 않다. 루터가 맥주 예찬론자였고, 교회가 맥주 발전에 공헌한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현대 개신교는 전용 맥주잔에 주기도문 이름을 붙일 정도로 맥주 애호가였던 루터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전영우는 오랜 동안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지금은 직접 재배한 홉을 사용해 맥주를 만드는 등, 맥주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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