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본래 산을 오르고자 했던 것은 신과의 만남을 위해서였다. 접신(接神)의 공간이었던 산, 신의 권위가 대접을 받던 시절은 끝났어도 아직도 우리는 산을 오르면 겸손해진다. 반면 땅을 돌봐주는 토지의 신은 나무에 깃들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의 하(夏)나라는 신이 머물 수 있도록 소나무를 심었고 주(周)나라는 밤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우리는 나무로 만든 신주(神主)를 받들며 그곳에 의지해 있는 혼령을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고 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하천 역시 신성한 공간이었다. 하천을 성스러운 대상으로 만든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해마다 반복되는 홍수였다. 한번 일어날 때마다 삶의 터전을 깡그리 앗아가는 물에 대한 공포는 하천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보듬고 섬겨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도록 하였다. 신라가 경주 시내에 세운 사찰들이 하천의 범람과 관련된 장소에 배치되어있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는 홍수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했던 고대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생각해 보면, 신석기시대 이후 정착하는 삶을 선택하면서부터 인간은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길을 포기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연 속에서 기생하기보다 타협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문명의 진보가 인류가 추구했어야 할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앞으로 지구가 맞이하게 될 결말을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자연을 개척하며 살아온 인간이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한 것 같다. 자연 앞에서 한없이 몸을 낮추는 겸손함, 개척하되 정복하지 않으려했던 자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요즘 들어 부쩍 빈번해지는 운하와 굴포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자연이 안겨다 줄 공포를 외면하는 인간 행위의 결말을 짐짓 계산해본다. 잘 알려져 있듯이 굴포천을 손질해 한강과 서해를 잇는 물길을 뚫으려는 시도는 이미 역사가 오래됐다. 조선 중종 때 손돌목의 험난한 뱃길을 피하기 위해 추진한 굴포는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실패로 돌아갔고 그에 관한 이야기가 원통고개와 관련해 전해진다. 조선시대는 강화도의 쪼개진 섬들을 하나로 묶어낼 만큼 토목기술이 발달해 있었다. 대공사에 대한 자신감이 어느 때보다 높았던 시절, 조선 정부는 운하에 대한 꿈을 쉽게 버리지 않았다.

강화 손돌목과 함께 선박들이 자주 침몰하던 대표적인 조난처 중의 한 곳이 충남 태안의 안흥량이다. 요즘도 심심치 않게 수장된 배 안에서 고려청자를 건져 올리는 곳이다. 이곳 안흥량을 피하기 위해 가적운하라고도 불리는 굴포운하를 뚫는 공사가 오랜 기간 진행됐다. 고려시대부터 따져보면 수백 년이 넘는 기간이다. 하지만 이 공사 역시 실패했다. 굴포유적지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당시의 공사 현장은 지금은 모두 논밭으로 변해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이와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가 원활한 조세 수입을 위해 추진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징세를 위한 안전한 교통망의 확보가 운하 사업의 근본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 정부가 파려했던 운하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까지 원통해하거나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주민들이 원했던 것은 뱃길이 아니라 범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더불어 공생하고 싶은 섬김의 하천을 갖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백 년간 계속된 태안의 굴포가 결국에는 모두 메워져 흙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80여년 전의 중국, 한적했던 어촌이었던 상하이에 화려한 네온사인과 높아만 가는 고층빌딩을 바라보며 한 작가는 이렇게 소리쳤다. “지옥 위에 지어진 천국이여!” 우리는 지금 다가오지 않을 천국을 바라보며 연옥의 고통을 감수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 김현석
인하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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