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올해도 엄마는 어김없이 내게 전화를 했다. 김장 한 통 가져가라고. 나는 여느 때처럼 답한다. 딱 한 포기만 가져오겠다고. 고된 김장문화를 이어가는 데 손 하나, 입 하나 보태기 싫은 내 고집과 그래도 나눠 먹고 싶은 엄마의 욕구를 존중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나름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한참 전에 성장기가 끝난 것도 모자라 갈수록 통통해지는 나를 엄마는 언제나 더 먹이고 싶어 애를 끓인다. 일고여덟 살 때부터 식구들 밥을 차려온 엄마에게 누군가의 끼니를 염려하는 건 어쩌면 반사신경처럼 자동으로 일어나는 반응일지 모르겠다. 엄마라고 평생 남의 식사를 걱정하며 살길 원했을까.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배추 절이는 기술이라든가 무채 써는 법을 익히기 위해 오랜 시간 애쓰지 않았을지 모른다. 실제로 엄마는 제복 입은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학력 제한 때문에 일찌감치 꿈을 접었을 뿐이다. 그리고 결혼해 아이 셋을 낳아 키우며 남편이 가져온 월급봉투가 아무리 얇아도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삼시세끼를 차려냈다. 재료 본연의 맛이나 영양 같은 건 신경 쓸 겨를도, 요리법에 별다른 지식도 없이 손에 닿는 가까운 식재료들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밥상을 차렸다.

그래서일까. 요리하는 엄마의 모습에는 결혼생활이 그대로 투영돼있다.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배고프다고 보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손놀림이 빠르다 못해 급하다. (식구들 밥때를 맞추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 습관이다.) 양념통과 조리도구들은 최소한의 동선을 고려해 배치한 듯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소금과 고춧가루, 참기름 병을 척척 잡아낸다. (식구 중 누군가 양념을 쓰고 제자리에 두지 않으면 동선이 꼬여 준비가 늦어진다. 화가 안 날 수가 없다.) 도마와 싱크대, 가스레인지를 오가며 여러 조리도구를 사용해 동시에 두세 가지 요리쯤은 거뜬히 해낸다. (일 서툰 사람이 도와주겠다고 옆에 서 있으면 오히려 걸리적거린다.) 독거노인임에도 국이나 찌개는 10인용쯤 되는 큰 솥에 끓여 두고두고 먹는다. 시금치나물은 한 번에 두 단을 무쳐야 음식 좀 했다 싶은 기분이 든다. (음식의 양은 여전히 다섯 식구가 기준이다.)

나는 엄마에게 옛날 우리에게 해줬던 음식에 대해 가끔 물어본다. 맛과 영양보다 더 중요했던 무언가가 음식마다 숨어 있다. 콩나물무침에 파를 안 넣었던 건 남동생이 싫어해서였다. 도토리묵을 밥상에 올린 날엔 희한하게 아빠가 밥상을 뒤엎어서 자주 먹지 않았다. 소갈비찜이란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돼지고기를 소금 후추만 뿌려 그냥 구워 먹은 건 양념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엄마만의 독특한 인생사가 담겨 있다.

우리 엄마만의 이야긴 아닌 것 같다. 충청도의 할매들이, 1925년생 할머니가, 자급자족을 꿈꾸며 시골로 간 예술가가, 자기만의 삶과 철학이 담긴 요리책을 펴냈다. 수수하고 평범한 요리들의 조리 과정을 직접 글자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려 더욱 실감 난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흔히 ‘손맛’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요리하는 사람과 음식이 김부각의 김과 찹쌀풀처럼, 요리하는 사람과 음식과 삶이 밀착되어 따로 떼어낼 수 없는, 가장 바람직한 요리책의 교본들. 손맛과 삶이 어우러진 요리책들을 소개한다.

# 요리는 감이여
| 51명의 충청도 할매들 | 창비교육 펴냄

“이건 30년 넘게 식당일 허면서 내 비법으로 만든 겨. 오이 같은 거를 소금에만 재서 담구믄 얼마 못 가서 쉬고 물르고 그런디 나는 그리 안 혀. 오이를 안 잘른 상태에서 소금물에 담궈 놔. 오늘 할라면 그 전날 저녁에 담구고 뭘로 딱 눌러. 그러고서 담날 아침에 건져서 짤라. (…) 다라에다가 오이 놓고 팔팔 끓는 물을 들이붜. 한 3분 있다가 다시 건져. 그러고선 찬물에 5분 정도 담갔다가 소쿠리에다 받쳐. 이대로만 만들믄 안 물르고 두 달을 두고 먹어도 아삭아삭하고 맛있어.” (29쪽)

글을 모르던 충청도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워 손 글씨로 자신만의 요리법을 썼다. 청소년들이 할머니들 얼굴과 요리 과정을 그림으로 그렸고 자원봉사자들이 할머니들의 이야기(구술)를 녹음해 글로 풀어냈다.

위 인용글은 ‘김인순 표 오이소박이’에서 따왔다. 김인순 할머니는 “돈 벌려고 부산에서도 살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30년 넘게 논농사, 양계장, 식당 일 드 안 해 본 일이 없다. 그래서인지 양쪽 무릎 관절 연골이다 닳아 버리고 고장 나 수술을 했다. 그래도 김장은 다하고 산다.”로 축약된 삶을 살았다. 할머니는 오이에 끓는 물을 들이붓는 비법을 소개하면서 “뭐이고 조금씩 해 보믄은 나중에 생각이 나고 위력(이력)이 나는 겨.”라고 말한다.

책 속엔 소고기미역국이나 계란찜처럼 지금은 흔해진 음식도 있고 병어볶음, 참외장아찌처럼 생소한 음식도 들어 있다. “내가 내 식대로 해서 만든 거라두 다른 사람들도 알려 주구 싶”다는 이예식 할머니 표 계란찜비법은 “비린내 없애는 고춧가루 넣고 따술 때 바로 먹는” 것이다.(99쪽)

할머니들은 여전히 받침 있는 글자는 어렵고 받아쓰기는 싫지만, 노래방에서 자막을 보며 ‘똑똑한 여자’를 부를 수 있고, 직접 담근 ‘엑기스’를 병에 넣고 이름과 날짜를 써 붙일 수도 있어 좋다고 한다. 51명의 할머니들은 감으로 익혀 한평생 밥상에 올린 음식들의 요리법을 또박또박 정성 들여 쓰면서 인생을 돌아본다. 도무지 맛없을 수 없는 요리들이다.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띈 건 맨 뒤에 실린 ‘할머니 요리어 사전’이다. “소금 한 갈림 한 바가지를 물에 타 넣는다” “솥에다 건그레 올리구” “배차를 듬성듬성 넌칠넌칠 썰어”와 같은 요리법에 할머니들의 해석을 대화체 그대로 옮겼다. ‘한 갈림’은 그릇 위로 수북이 쌓인 부분을 싹 갈긴 것, ‘건그레’는 솥 위에 얹는 막대기, ‘넌칠넌칠’은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크기라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조금씩 울고 싶던 마음이 맨 마지막 장 글과 그림을 보고서 결국 터지고야 만다. 할머니가 한글 학교에서 그렸을 노을이 물든 무지갯빛 바다와 그 아래 적힌 “출렁대는 바다를 보면 내 마음도 화해진다”라고 쓴 글자 때문이다. 보면 볼수록 재미난 곳이 눈에 띄는, 그야말로 ‘소장각’인 책이다.

# 할머니의 요리책
| 최윤건, 박린 지음 | 위즈덤하우스 펴냄

“제 이림은 최윤건이니다. 저는 나이가 9심이살입니다. 그레서 글씨도 몰나서 잘 못서서요. 잘 바주요.”

1925년생 할머니가 요리법을 쓰고 손녀가 그림을 그렸다. 손녀인 박린은 3년 동안 할머니 곁에서 할머니의 레시피를 기록했다. 연로하신 할머니가 하나의 요리 방법을 적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쓰면서, 쓴 것을 읽고 다시 읽어 가며” 적은 요리법을 할머니는 쓰다가 깜빡 졸기도 하셨다고.

“오누르 무말네 하하게씀니다 무르 써러서 말나서 고추가가짓 야념 다해서 머금면 되지 2천 104녀 1021121 사기아저시안데서 저나가완다타” (78쪽)

암호 같은 글자들이지만 손녀 작가가 요리 과정을 그려놓아 요리법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래도 할머니가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알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독자의 마음을 귀신같이 알고는 책 뒤에 ‘할머니 글 풀이’를 따로 실었다. 위 글은 “오늘은 무말랭이 하겠습니다. 무를 썰어서 말려서 고춧가루같은 양념 다 해서 먹으면 되지. 2014년 11월 21일. 상기 아저씨한테서 전화가 왔단다.”라는 뜻이다.

일하시는 부모님 대신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만들어 준 밥을 먹으려 자란 손녀는 서른 가지의 요리마다 할머니와의 일화를 담백하게 소개한다. 할머니는 올해 7월 세상을 떠났고, 책 마지막 장에 “린아 할머니가 만원잦리 하나 낯다 가지고 가서 맛있는 거 사먹어라”라는 메모를 남겼다.

# 먹이는 간소하게
| 노석미 지음 | 사이행성 펴냄

10년 넘게 자연에서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는 노석미 작가가 자신이 좋아하고 늘상 해 먹는 음식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담아낸 에세이다. 단순한 재료로 간단히 만든 요리들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시금치 김밥을 만드는 과정은 무척 단순하다. “밥을 고슬고슬하게 짓는다. 데친 시금치에 참기름, 소금을 넣어 무친다. 그 외 김밥에 넣을 재료들도 준비한다. 김밥을 만다.”(28쪽) 이 짧은 과정에 깃든 저자의 감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겨울을 이겨낸 시금치는 잎이 두툼하고 그 맛은 초록색에서 나온 것인가 싶게 고소하다. 김밥에 별다른 재료를 넣지 않아도 맛있다.(그래도 김밥에는 단무지를 꼭 넣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단무지는 김밥의 주인공.) 봄볕을 받으며 먹는 김밥은 소풍을 나온 것 같은 기분을 안겨준다.”(29쪽)

집 마당 앞에서 방금 캔 제철 재료들로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는 단순한 요리법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본연의 맛을 낸다’는 음식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책 제목인 ‘먹이는 간소하게’는 음식을 소중하게 여긴 법정 스님의 토방 부엌에 붙어 있던 문구라 한다. 작가 역시 “사람이 먹고 사는 일이 동물의 그것에 비해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라며 요리법뿐만 아니라, ‘먹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먹이’를 누구와 함께 먹었는지 등을 기록하며 음식의 소중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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