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여섯 명의 한기씨 | 이만교 지음, 문학동네 출판 | 2019.10.14.

[인천투데이] 스스로 무심하게 살았구나 여기며 깜짝 놀랄 적이 있다. 이만교의 ‘예순여섯 명의 한기씨’를 읽고 나서도 그런 깨달음이 퍼뜩 들었다. 용산 참사를 다룬 게 분명하지만, 작가는 이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읽으면서 이 참사를 잊은 지 오래됐다는 생각을 했고, 남의 고통에 둔감한 자신을 발견하고 무참했다. 언젠가 유행했던 말, 나만 아니면 된다는 잔인한 무심에 나도 물들어있던 셈이다.

임한기라는 청년이 있었다. 한 해 꼬박 모은 복학자금을 할머니 무릎수술로 썼다. 이런 효자가 없다. 다음 해에라도 복학하려면 돈을 벌어야하기에 공사판에 나갔다. 새벽 네 시 반에 나가 밤 열 시에 돌아오는 중노동을 했다. 서툴렀지만 성실했다. 악착같이 일했으나 사달이 났다. 열 달 동안 번 돈을 도박으로 날렸다. 사람을 쉽게 믿은 게 불찰이었다. 같은 공사판에서 일하던 선배가 쳐놓은 덫에 걸렸다.

처음에는 공장 경비를 구한대서 갔더랬다. 알고 봤더니 노조나 철거민 상대로 못된 짓 하는 용역깡패였다. “노가다 시다바리로 조뺑이 쳐” 버는 돈보다 훨씬 많이 벌었다. 여기서도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노조 쪽과 붙어 크게 다쳤다. 용역회사에서 보상이라고 국숫집을 차려 줬다. 문제는 하필 국숫집 잘 나갈 적에 그 지역 재개발이 결정됐다는 점이다. 작가는 뚜렷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우연인지, 계책인지.

재개발하면 집주인은 손해 볼 게 별로 없다. 심지어 큰돈을 만지기도 한다. 세입자만 죽어난다. 권리금 받고 들어왔는데, 재개발하면 이것을 돌려받을 수 없다. 장사하느라고 들인 돈도 그냥 날리게 된다. 재개발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적거려 새롭게 투자한 집은 아예 망할 정도다. 하지만 재개발 업체는 세입자 문제를 위력과 폭력으로 해결하려한다.

비열한 협박, 위력 시위, 구체적 폭력으로 세입자가 스스로 동네를 떠나게 한다. 작가는 분노하며 이런 장면을 묘사하지 않았다. 덤덤하다. 하긴, 그래서 읽으며 더 분노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세입자가 너무 하지 않느냐 할지 모르겠다. 언론을 볼라치면, 무리한 요구를 해서 한몫 보려하지 않나 싶으니까 말이다. 과연 그럴까?

“그래도 저희는 나가서 방해를 해야 해요. 용역들 때문에 실질적인 방해를 놓지는 못해도, 그렇게 하면 용역비용이 적잖게 들잖아요. 용역비용을 들여가며 공사를 하느니, 저희 요구를 들어주는 게 낫겠다 싶을 때에야 들어주기 때문에 계속해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들 들어갈 비용보다 지체 비용이 더 들어갈 것 같을 때에만 요구를 들어줘요. 그러니까 죽어라 싸워야 해요.”

궁지에 몬 것은 개발 업체다. 오로지 돈 때문이다. 그런데 피해자가 더 비난을 받는다. 권력과 언론과 기업이 짬짜미가 돼 진실을 감춘 데다 우리의 무심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한기 씨는 어찌 되었나? 여러 명의 증언으로 구성된 작품을 읽어볼라치면, 우연히 재개발 지역에 국숫집을 차린지라 다른 세입자와 함께 투쟁한 듯하지만, 개발 업체의 프락치인 것도 같다. 그가 망루에서 떨어진 것을 목격한 사람이 여럿이지만, 과연 죽었는지 사라졌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한 증인의 말대로 “그 사람이 용역이었는지, 철거민이었는지, 프락치였는지, 열사였는지” 모른다.

작가는 왜 한기 씨를 회색지대에 놓았을까? 답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소설의 얼개가 한기 씨의 삶과 마지막을 추적하는 기자가 여러 명의 증언을 듣는 거로 돼있어 이런 식으로 마무리한지도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정작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면 한기 씨 같지 않을까 싶었다. 과연 나는 세입자의 권리를 타협하지 않고 일관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외려, 용역처럼 이웃의 권리를 희생해서라도 내 이익을 더 크게 챙기려하지 않았을까? 우리 삶의 주변에 여전히 비극이 반복된다. 나는 지금도 무심하다. 그것이 성실하지만 오락가락하는 한기 씨 같은 인물을 낳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