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영우의 맥주를 읽다

[인천투데이] 앵커브루잉과 시에라네바다를 효시로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소규모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1988년에 마이크로 브루어리가 56개나 설립된다. 대기업이 장악한 미국 맥주시장에서 맛있는 맥주를 만들어 마시기 위해 소규모 양조장이 많이 설립됐지만, 이들이 시장에 정착하는 데는 난관이 많았다. 당시 설립된 양조장들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양조장은 그리 많지 않다.

안호이저 부시, 밀러, 쿠어스와 같은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유통망을 뚫고 크래프트 비어가 자리 잡는다는 것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서도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미국의 일반 소비자들에게 크래프트 비어는 생소했고 인식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기에 초창기 미국 마이크로 브루어리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현재 한국에도 수입돼 수제맥주 팬들에게도 익숙한 브루클린 브루어리, 구스 아일랜드, 노스 코스트 등의 양조장은 1980년대에 크래프트 비어 양조장 설립 바람이 불 때 설립돼 자리 잡았다.

1980년대에 설립된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들이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몇몇 양조장을 제외하고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1990년대 들어서 새로운 마이크로 브루어리들이 크래프트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다. 대중들도 서서히 크래프트 비어의 매력을 알기 시작했고, 소규모 양조장들이 생산하는 맥주가 시장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발라스트 포인트, 로스트 코스트, 스톤 브루잉, 도그피시 헤드, 플라잉 도그 등의 양조장이 이 시기에 설립됐다.

19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크래프트 맥주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마이크로 브루어리들이 약진하기 시작하면서 대규모 자본이 크래프트 맥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맥주 대기업들은 적극적으로 개성 강한 소규모 양조장을 인수ㆍ합병한다. 상당히 많은 소규모 양조장이 대기업에 합병됐고, 한국 시장에서도 친숙한 구스아일랜드나 발라스트 포인트와 같은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은 현재 대기업 소유가 됐다.

다행스러운 것은 대기업에 인수된 이후에도 자율성을 보장받아서 기존 맛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이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을 인수한 이유는, 물론 그런 개성 있는 맥주 브랜드를 소유하기 위한 것이니 성공적인 마케팅 측면에서도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난 크래프트 맥주 붐(boom)은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에일 맥주의 종주국 영국에서도 라거 맥주 시장점유율이 매우 높았는데, 크래프트 맥주 붐을 타고 다시금 에일 맥주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에일 맥주의 나라답게 다양한 마이크로 브루어리가 맛있는 맥주를 만들고 있다.

미국의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들이 당시 라거 일색이던 미국 맥주시장에서 영국식 에일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 맥주들은 전통적인 영국 에일 맥주와는 차이가 있는 미국식 에일 맥주였다. 미국 발(發) 에일 맥주는 거꾸로 종주국 영국에 영향을 미쳐 영국에서도 전통 영국식 에일 맥주와는 또 다른 개성 강한 맥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니, 세상은 돌고 돈다.

인천 중구 소재 '칼리가리 브루잉'의 맥주 양조장.(인천투데이 자료사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거세지기 시작한 크래프트 비어 열풍은 이제 전 세계적 현상이 됐다. 어디를 가든 크래프트 비어를 내놓는 펍을 찾을 수 있으며, 한국에서도 수제맥주집이 한 집 걸러 생겨나고 있다. 펍 크롤링도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집시 양조자 미켈러(Mikeller)가 태국 방콕에 지점을 낼 정도로, 전 세계 어디에서든 크래프트 비어를 만날 수 있다. 집시 양조는 자신의 양조장을 갖지 않고 여러 양조장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레시피로 맥주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덴마크의 미켈러가 집시 양조의 시초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맥주를 만들고 있다.

2018년 기준 한국에는 크래프트 비어 양조장이 100여개 등록돼있다. 주세법이 개정된 2009년 이전에는 대규모 시설을 갖춘 양조장만 맥주를 양조할 수 있었다. 법이 개정돼 소규모 양조장에서도 맥주를 생산할 수 있게 된 이후에 많은 마이크로 브루어리가 생겨났다 사라졌다. 지금도 계속 양조장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 중에는 마이크로 브루어리 수준을 벗어나 큰 규모를 갖춘 양조장이 된 경우도 있다. 세븐브로이는 상당히 큰 규모의 기업이 됐고, 한국 수제 맥주의 효시격인 카브루는 탄탄하게 자리 잡아 크래프트 맥주 문화 형성에도 힘쓰고 있다. 플래티넘 같은 중규모 양조장은 많은 펍에 맥주를 공급하는 중견기업이 됐고, 플레이그라운드와 같은 브루 펍 개념의 양조장은 뛰어난 맥주 맛으로 마니아들에게 호평 받고 있다.

주세법은 향후 소규모 크래프트 비어 시장을 더욱 활성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마이크로 브루어리에서 양조한 맥주도 편의점 등에서 판매할 수 있게 법이 개정되고, 지금보다 더 작은 규모의 시설만 갖춘 브루 펍이 활성화되는 방향으로 개선된다면 크래프트 비어 문화는 더욱 다양하게 발전할 것이다.

※ 전영우는 오랜 동안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지금은 직접 재배한 홉을 사용해 맥주를 만드는 등, 맥주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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