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서늘하고 따뜻한, 기묘한 코미디
[영화읽기]서늘하고 따뜻한, 기묘한 코미디
  • 이영주 시민기자
  • 승인 2019.10.1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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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메기(Maggie)│이옥섭 감독│2019년 개봉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낡았지만 꽤 규모는 있어 보이는 마리아 사랑병원. 엑스레이실에서 한 남녀가 섹스를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엑스레이 촬영 버튼을 눌렀다. 남녀의 섹스 장면이 담긴 엑스레이 사진은 병원 정원 한복판 성모상에 걸리고, 조용하던 병원에는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온갖 추측과 소문이 퍼져나간다.

사진 속 주인공이라 의심 받은 간호사 윤영(이주영)은 엑스레이 사진을 집으로 가져와 남자친구 성원(구교환)에게 보여주고, 자신들이 사진 속 주인공이 아닐까 의심하다 결국은 그렇다고 결론 내린다.

부원장 경진(문소리)은 사실관계는 확인하지 않은 채 윤영이 엑스레이 사진을 가져갔다는 이야기만 듣고 윤영에게 퇴사를 종용한다. 잠깐 퇴사를 고민하기도 한 윤영은 부원장의 부당한 요구에 “병원에 계속 나오겠다”고 선언한다.

독립영화계에서 이미 많은 단편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과 세계관을 보여준 이옥섭 감독의 장편 데뷔작 ‘메기’는 현실로부터 한 발 떨어진 듯한 화면과 상황들이 기묘한 웃음을 주면서도 장면과 장면마다 번뜩이는 차가운 현실 반영에 서늘함마저 느끼게 만드는 블랙코미디 영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했다.

지금까지 국가인권위원회가 유수한 감독들에게 제작을 의뢰해 만든 영화가 많지만 이옥섭 감독의 ‘메기’는 독보적이다. 꽤 진지하거나 교훈적인 이전 영화들과 달리 ‘메기’는 발랄하다. 보통의 드라마 화법과 다르게 통통 튀는 구성과 컬트적 요소가 웃음을 자아낸다.

그렇다고 무작정 가볍지만은 않다. 차별과 편견을 고민하게 만들고자 기획한 국가인권위 영화인만큼, 영화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마주치는 폭력과 편견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현실감 없는 화면과 상황은 판타지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다큐멘터리보다 더 현실적이어서 모골이 송연하다.

문제의 발단이 된 섹스 엑스레이 사진이 단적인 예다. 동의를 구하지 않은 불법 촬영이었으나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억측과 소문만 무성할 뿐 어느 누구도 찍은 사람이 누군지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 속 주인공이 아닌 윤영은 사진 속 주인공이라 소문이 났다는 이유만으로 퇴사를 종용 당한다.

윤영의 남자친구 성원은 오랜 실직으로 윤영에게 빌붙어 살고 있고, 그들이 살고 있는 월셋집은 재개발구역이라 곧 쫓겨날 처지다. 윤영이 가진 돈으로는 반지하를 벗어난 방 하나 구하려 언덕에 언덕을 올라야한다. 거기다 윤영은 남자친구 성원이 전 애인에게 데이트폭력 가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괴로워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청년, 특히 여성에게 닥칠 수 있는 거의 모든 폭력과 곤경의 종합선물세트가 윤영 앞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심각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을, ‘의심’의 씽크홀에 갇히지 않고 빠져나가려 애쓰는 윤영의 발랄한 모험담으로 그려낸다. 여기에 이옥섭의 페르소나와 구교환의 능청스러움과 문소리의 노련함이 더해져 영화는 꽤 탄탄한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풀어내는 화자는 사람이 아닌 병원 어항에서 살고 있는 메기(천우희)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 나오는 일이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류시화 시인의 이 말은 윤영으로 대표되는 청년 여성이 봉착한 어려움에 대한 묘사이자,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한 주문과도 같다. 윤영을 지켜보고 위로하고 믿어주며 질문하는 메기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다.

영화 ‘메기’는 대한민국 20대 청년 여성의 불안을미세하게 포착해내면서도 감독 특유의 독특한 세계를 보여준 장편 데뷔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 집, 밤의 문이 열린다, 아워바디에 이어 메기까지, 30대 여성감독들의 약진에 행복한 2019년이다.